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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등반지

 

글: 정민디

 

“황량한 고원, 자연과 나는 하나였다”

재미한인산악회 티벳-네팔 횡단 등반기 <11>
입력일자: 2010-03-05 (금)  
■ 성자의 거주지 ‘시샤팡마’ 


8천m 이상의 14좌 중 가장 낮은 산
짐 나르며 젖과 고기 제공하는 블랙 야크는
티벳고원에 없어서는 안될 고마운 존재 


티벳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꿈인 듯 몽롱하게 지나쳐 온 티벳의 고원은 시간의 개념을 흩어 놓았다. 그리운 얼굴들을 어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 못 본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의 실종으로, 거리의 모호함으로, 그리움은 그다지 사무치지가 않았다. 촉박한 시간도 감정의 흐름도 무시하고 싶을 때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일까. 

‘시샤팡마’를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서 다시 여권 검사를 했다. 퍼밋과 통행료는 쌍둥이같이 늘 붙어 다니는 것이다. 8,000m급 산은 그 자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소중한 자원이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할 때 제일 탐낸 것이 시샤팡마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샤팡마는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좌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동쪽으로 순코시(Sunkosi) 강과 서족으로 트리술리(Trisuli) 강을 끼고 있는 랑탕-쥬갈 지역의 최고봉이다.

이 산은 8,000m급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관계로 14좌 중 가장 늦은 1964년에야 허륭 대장이 이끄는 중국 원정대에 의해 초등된 산이다. 산명은 티벳어로 ‘황량한 땅’ 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산을 네팔에서는 ‘고사인탄’(Gosainthan)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50여킬로미터 떨어진 힌두 성지 ‘코사인쿤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사인쿤드는 힌두어로 ‘성자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시샤팡마는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는 서쪽으로 무려 420킬로미터나 떨어진 반면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북동쪽으로 불과 85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국은 대륙의 공산화에 성공 후 최후의 8,000m급 산을 초등정하기 위해 1961년부터 3회의 정찰로 현재의 주 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갈라 빙하를 통해 7,160m까지 도달한 후 1964년 왕부주 등 10명의 중국 산악인을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정식 명칭은 티벳어로 “일기변화가 극심한 산”을 의미하는 ‘시샤팡마’(Shisha Pangma)로 통일, 사용된다. 1979년 중국이 외국 등반대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10년 이상 발길이 끊겼던 이 산은 개방 이래 현재까지 남북, 북벽, 서릉 등지에 6개의 새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는 가을 시즌에 정상을 공략하려는 프랑스에서 온 팀이 있어 나름대로 붐볐다. 블랙 야크들도 멋진 몸매의 카리스마를 풍기며 카라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티벳 고원의 블랙 야크들은 참으로 티벳인들을 위하여 살신성인을 하고 있는 영물이다. 젖과 고기로 양식을 주고, 털은 옷으로, 야크버터로는 등불을 밝히고, 게다가 힘센 포터이면서 심지어는 그들의 분비물까지 땔감으로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다. 야크를 볼 때면 감사함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진기지를 구축하러 먼저 등반 하던 프랑스 대원 중 한 명이 추락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대원들과 사진도 찍고 우리 재미한인산악회의 동정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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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셰르파도 만났다. 이름은 ‘파상 셰르파’였다. 한국 여성 최초로 8.000m급 이상 14좌를 등반하게 되는 오은선 대장을 증언해 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오은선 대장의 칸첸중가(8,598m) 등정 정상사진을 가지고 한 산악인이 의혹을 제기했다. 민감한 사항이니 만큼 자칫 큰 문제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다. 한국의 중견 산악인인 신영철 대원이 파상 셰르파와 인터뷰를 했다. 파상은 오은선 대장과 비슷한 시기에 12좌째인 시샤팡마를 등정한,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과 함께 한 셰르파다. 에두르네 파사반과 오은선 대장은 누가 여성 최초로 14좌를 먼저 등정하느냐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사이이다. 파상 셰르파는 진심이 담긴 어조로 오은선 대장은 분명히 정상을 밟은 것으로 네팔 정부로부터 인증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의혹을 제기했던 산악인이 사과기사를 게재해 모든 문제가 일단락됐고 오은선 대장은 3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면 14좌의 꿈을 이룸과 동시에 세계 여성 최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 대원들은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언저리의 트레킹 허가를 어렵사리 받아냈다. 프랑스 팀의 카라반도 마침 시작되어 짐을 잔뜩 짊어진 블랙야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평선 뒤에 있는 시샤팡마를 향하여 모두 전진했다. 

나는 방해받지 않는 텅 빈 마음의 상태가 되고 싶었다.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지평선 하나에 다다르니 그 너머에는 수많은 지평선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봇물이 터졌다. 천리만리 떨어진 황막한 고원에서 내 마음을 더욱 가깝고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 것이다. 자연과 신과 내가 교접되어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 곳에서 신을 느꼈다. 나를 이다지 눈물겹게 한 절대자가 분명히 있었다. 과연 시샤팡마는 ‘성자의 거주지’란 의미가 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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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텐진이 가이드를 하면서 눈 여겨 봤던 오지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떠나기 전 대원들이 여러 가지 물품을 준비했다. 적당한 마을을 찾느라 차에 소중히 싣고 다녔다.

네팔로 가면 간식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아 먹을 것의 대부분도 내려놓고 가려고 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시냇물도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마을은 변변히 농사지을 땅도 없는, 말 그대로 척박한 곳이었다. 이십여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깨끗한 카펫을 가지고 나와 마당에 깔아 우리를 앉게 하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유순하고 초연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행복을 주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이 마을을 때때로 찾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을을 떠나 얼마 되지 않아 포장도로가 시작됐다. 이제 병풍처럼 늘어선 히말라야를 감상할 수 있는 라룽라(5,200m)고개를 지난다. 마지막으로 고도가 높은 곳이다. 설산들이 우리를 환송하러 모두 나왔다. 우리가 만났던 초모랑마, 초오유, 시샤팡마가 꼭 다시 오라고, 무사히 잘 가라고 손짓한다. 국경도시 장무(2,300m)로 떠났다.

<수필가 정민디>


시샤팡마를 배경으로 산악회 회원들이 트레킹을 하고 있다. 시샤팡마는 8,000미터급 14좌 중 가장 낮지만, 중국 원정대에 의해 가장 나중에 정복됐다.

야크는 티벳인들에게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젖과 육류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또 외국 원정대에게는 짐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시샤팡마 등정을 준비 중인 프랑스 원정대와 산악회 회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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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협곡에 내린 짙은 운무 ‘장관’

재미한인산악회 티벳-네팔 횡단 등반기 <12>
입력일자: 2010-03-12 (금)  
■ 네팔로 가는 길


산 깎아 길 만들었을 때 수많은 사람 희생
네팔에 닿으니 냄새 달라져 카레향이 솔솔
티벳과는 다른 풍광 ‘미지의 세계에 기대감’


라룽라(5,200m) 고개를 정점으로 네팔로 가는 길은 고도가 많이 내려간다. 국경도시 장무(2,300m)에서 오늘 숙박을 한다. 수많은 폭포가 장관을 이루는 보테코시 계곡을 경유하여 가는 우정공로(Friendship Road)는 산을 깎아 만들어서 가는 길 내내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절벽 아래가 운무가 짙게 드리워져 잘 안보여 덜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보이는 계곡과 보테코시강의 장관을 전부 못 보는 게 많이 아쉬웠다. 이 길을 만드느라 3만명이 희생되었다 한다. 티벳인들이 일을 했는지, 중국인들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나라 간의 우정(?)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인명이 죽었다.

5시간 정도 걸려 장무에 도착했다. 도시가 산비탈에 위치해 집들도 농토도 다 계단식이다. 장무는 국경도시답게 여러 인종이 모여 시끌벅적 복잡했다. 지나다 보니 가게에 한국 과자류들도 판다.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는 데 티벳하고는 음식이 현저히 달라졌다. 이제 부터는 네팔의 카레 냄새에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

밥 먹는 내내 환전상들이 돈을 바꾸라고 끈질기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도가 많이 낮아져 대원들은 오래간만에 편안하다. 내일이면 가이드 텐진과 헤어져야 한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이 순정하고 청정한 청년에게 격려를 해주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여자 대원들의 수다로 밤이 깊어갔다.

국경은 바빴다. 국경 초소까지의 좁은 길에 짐과 차량들이 줄지어 있다. 그동안 고마웠던 랜드크루저 기사들과도 작별했다. 텐진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코가 붉어져 마지막 수속을 돕고 있다. “타시딜레(고마워), 텐진. 공부 많이 하고 행복하게 지내.” 늘 같이 따라 울던 마음씨 좋은 유진순 대원은 작별을 많이 아쉬워한다.

이제 다리 위에 빨간 라인을 넘어가면 네팔인 것이다. 한 발짝 뛰어 라인을 넘어 “티벳 독립만세”하고 외쳤다. 저 멀리 울고 서 있는 텐진이 보인다.
코다리(Kodari) 출입국 관리소에서 2주간의 네팔 비자를 받기 위해 간단히 면담과 체온 체크를 하고 입국수속을 마쳤다. 네팔에서 3일간 일정을 마치고 나면 대원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어서 네팔 입국이 설랬다. 카트만두에서 온 가이드들이 버스 앞에서 한글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2시간의 시차로 시계를 고쳤다.

한국에서 6년간을 산 경험이 있는 가이드 ‘파와라나’는 몽골인으로 한국말을 잘했다.

버스에 타니 “나마스테,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나마스테’(namaste)란 말은 산크리스티어(인도·네팔·티벳의 언어)로 “내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 경배드립니다!”란 뜻이다. 대원들은 같이 따라서 “나마스테”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서 파와 라나는 네팔의 보테코시 강가의 좁은 길로 천천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받아 적는다.

코다리(Kodari)는 네팔 중국 간의 국경지대이다. 아찔할 정도로 황홀한 자연풍경 외에도 예전 네팔상인들의 무역루트의 출발지였던 이색적인 역사를 지닌 곳이다. 북쪽으로 라사를 향하던 상인들은 티벳 고원으로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는 동쪽을 향하기 전에 쿠티(Kuti)를 지나 코다리를 통과하여만 했는데, 이 국경마을은 아직도 티벳과 네팔사이의 중요한 무역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카트만두에서 어르니코 고속도로 144km 지점에 위치하는 이곳에서 거대한 협곡과 주변 산들의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코다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뜨거운 물’ 이라는 뜻의 타토파니(Tatopani) 온천지역은 이곳의 치료 효과 때문에 네팔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코다리는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4~5시간 걸리는 네팔 국경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국경이 열리면 걸어서 중국으로 내왕하는 현지인과 외국인, 내왕하는 차량으로 인하여 마을은 생기가 넘친다. 불과 몇 시간을 사이에 두고 풍경도 이곳과 티벳은 차이가 크다. 티벳의 한랭한 기온과 망망한 대초원, 순백의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은 온화한 기후와 밀림, 낮은 산으로 바뀌고 현지인의 생김새도 이국적으로 변한다. 이런 변화가 대원들에게는 아주 즐거우며,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 게 한다.

시차가 바뀐 탓도 있지만 3시에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도(1,700m)도 낮아졌고, 양식 부페도 훌륭해서 입맛이 났다. 도시로 진입하는 어르니코 고속도로는 2차선으로 전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자전거, 모토 사이클, 사람, 자동차가 먼지 속에 뒤섞여 움직인다.

네팔은 북쪽으로는 중국의 시짱 자치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 정상이 공동 국경으로 되어 있다.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 800km,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140∼240km로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대가 몇 군데 있다. 오랫동안 지형조건에서 빚어진 고립성과 스스로 초래한 폐쇄성이 지속되어 세계에서 가장 개발이 안 된 나라로 손꼽힌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 우는 네팔은 세계 10대 고봉 중 8개와 7,650m이상이 넘는 봉우리가 50 개 넘게 존재하는 자연적 경이가 넘치는 나라이며, 문화와 언어가 다른 60여개 종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현재 세계유일의 힌두왕국이며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불교문화의 모태이기도 한 이곳은 히말라야의 만년설과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인 까닭에 많은 산악인들과 종교 순례자,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저녁 때가 다 되어서 호텔에 도착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한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한식집 주인은 산악인으로, 네팔에 자주 등반을 오다가 눌러앉은 지 10년이 됐다고 한다. 음식은 아주 훌륭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는 데 카트만두 시내가 다 정전이 됐다. 자주 있는 일이라 큰 호텔이나 식당들은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내일은 카트만두 시내의 유적지와 힌두교 사원을 방문하려고 한다.


< 수필가 정민디>


네팔과 인접한 국경도시 장무. 깎아지른 듯한 계곡에 위치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우정도로’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인데다, 길도 좁아 초행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도로 위로 쏟아지는 폭포를 막기 위해 시멘트 구조물을 설치했다.

네팔에 입국한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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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로 가자” 붐비는 카트만두

재미한인산악회 티벳-네팔 횡단 등반기 <13>
입력일자: 2010-03-19 (금)  
여러 인종 산악인들로 도시전체가 활기
사원의 나이 어린 ‘쿠마리 여신’ 인상적
화장터 ‘파슈파티나트’는 전통의 관광지


카트만두는 히말라야를 보려고 세계에서 몰려드는 도시답게 여러 인종들로 북적거렸다. 오늘은 타멜 거리에서 20분 정도 걸어서 구왕궁 (덜발 스퀘어 : Durbar Square)과 쿠마리 사원(Kumari Bahal)을 가기로 했다. 구왕궁 앞 광장을 일컬어 더바 광장(Durbar Square) 또는 바산타풀, 하누만도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 신성시 하는 소가 편안하게 앉아 비둘기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힌두교를 믿는 네팔에는 3억3,000만의 신이 있다고 하는데 쿠마리 여신도 그중 하나이다. 쿠마리 사원에 가면 살아있는 여신인 쿠마리를 볼 수 있다. 쿠마리의 선출기준은 6세 이전의 소녀로 부모가 살아 있어야 하며, 다쳐서 피를 흘린 적이 없어야 하며, 미모 보다는 신성함을 중시한다. 그렇지만 첫 생리를 시작하면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다음 쿠마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쓸쓸하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 사진촬영을 금지하고는 짙은 화장을 한 유치원생 정도의 쿠마리여신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애기여신은 우리를 처연한 표정으로 잠깐 훑어보고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네팔은 카트만두 분지의 네왈리족에게서 4세기에 리차비 왕조 가 성립되었고, 말라 왕조가 번영을 누린 15-18세기 후반에는 대승 불교를 비롯한 종교문화가 발전되었다.

오늘날의 네팔 왕국의 모습은 18세기 후반 구르카 족의 나라야니 1세의 통일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1814년 동인도 회사와 구르카족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시킴지역 등을 빼앗기는 시련을 겪었다. 또한, 네팔은 라나 가문이 국정을 장악했던 1864년부터 약 104년 동안 쇄국의 시기를 맞았다. 이 당시 대다수 국민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인도 등 나라 안팎에서 정권 교체의 노력에 힘씀으로 1950년 다시 왕정이 복귀되었다.

이후 국왕을 중심으로 한 네팔 식 민주주의 판차야트 제도가 도입되었으나 1972년 시작으로 지식층과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급기야 1990년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져 판차야트 제도 폐지와 왕의 국정 불간섭 등 사태수습에 들어갔으나 민주화 진통의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아직까지도 힘겨운 과도기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네팔은, 히말라야라는 위대한 자연을 끌어안은 라이벌이 없는 드문 풍경에 빛의 땅이다.

스와얌 부나트(Swayamb bunath) 로 이동했다. 카트만두(Kathmandu)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2㎞를 가면 볼록한 언덕위에 흰 스투파(탑, 塔)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네팔 불교의 가장 오래된(약 2000여년)사원이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 문화유산 스와얌 부나트이다. 외국 여행자들에겐 몽키 템플(Monkey Temple)로 통하듯이 이곳에 가면 원숭이들이 아주 많다. 정상에 오르면 티벳식 반구형 스투파 위의 4각 구조물에 부다의 눈이 그려져 있다. 이는 삼라만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상징한다.

스와얌 부나트에 오르면 카트만두 시내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주위의 조형물들도 아름답다.

짧은 일정으로 가볼 곳이 많아 사진 찍고 가이드의 설명듣기로 바빴다. 오후에는 화장터인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에 갔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많은 개들이 서성거렸다. 하루 종일 고기타는 냄새가 나니 개들이 침을 흘리며 모여들만 했다. 파슈파티나트는 갠지스 강의 상류에 세워진 네팔 힌두교도 들의 최고 성지이다. 시바 신을 위해 세워진 이 사원은 서기 477년에 처음 지어졌고, 10세기경에 파괴되어 지금의 건물은 말라 왕조 때 다시 지어진 것이다. 인도에서 건너온 많은 승려들이 있으며 힌두교도가 아니면 사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힌두 사원보다는 죽은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돈 많은 인도인들 중에는 죽을 날이 가까워오면 조금이라도 시바 신에게 가까이 가려고 몇 달 전부터 이 곳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 머물며 죽음의 시간을 경건하게 기다린다. 사원 옆쪽의 강물을 따라 몇 구에 시체가 불에 훨훨 타고 있었다. 태워야만 윤회를 할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네팔에서 제일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이다.

저녁에는 아시아 산악연맹 회장이 네팔전통식당에 대원들을 초대했다. 세르파족이었던 그 분은 벨기에 여자산악인과 결혼을 해서 사업을 하여 많은 부를 이뤘다한다. 예전에는 왕족들만 왔던 레스트랑은 격조가 있는 곳이었다. 웨이터가 먼저 럭시라는 술을 조그만 술잔에 정확히 서서 떨어뜨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한정식 같이 계속 코스로 음식이 나왔다.

네팔의 주식은 쌀이며, 보통 하루 2끼 대표적인 식사메뉴인 ‘달빛(콩 스프), 배(익힌 밥), 떨까리(야채반찬)로 구성된다. 예전에는 손으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점차 숟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네팔 식사로는 밥에 섞어 먹는 음식으로 토마토와 여러 야채를 재료로 한 산지마을 사람들이 즐겨먹는 속티와(Soktiwa), 볶은 옥수수를 넣어 끓인 죽으로 데도(Dhedo), 그리고 마수(Maasu), 기우(Ghiu)등의 전통음식이 있다.

식사도중 민속음악과 춤으로 흥을 돋우어 주었다. 전통음악과 춤은 네팔문화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네팔의 전통음악은 정해진 악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선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춤은 오락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기도 한다. 네팔 전통 춤은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눈 깜박거림, 손의 작은 움직임에도 의미를 가진다. 대원들 모두 함께 춤을 배워 흥겹게 어울려, 그들의 문화 속에 취한 밤이었다.

< 수필가 정민디>


네팔 힌두교도들의 최고 성지 파슈파티나트 전경. 갠지스 강의 상류에 세워진 이곳은 시바 신에게 가려는 사람들의 화장터로 더 알려져 있다.

한 식당에서 만난 네팔 전통무용수들. 네팔의 음악은 악보가 아닌 즉흥적인 선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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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g/19/s06-1, 2
- 네팔 힌두인들의 최고 성지 파슈파티나트 전경. 갠지스 강의 상류에 세워진 이곳은 시바 신에게 가려는 사람들의 화장터로 더 알려져 있다.

- 한 식당에서 만난 네팔 전통무용수들. 네팔의 음악은 악보가 아닌 즉흥적인 선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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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고 싶은 히말라야 설산이여”

재미한인산악회 티벳-네팔 횡단 등반기 <14·끝>
입력일자: 2010-03-26 (금)  
시 전체가 유적지인듯 옛 건물 그대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으로 산행을 마무리
소박한 산사람들, 그들의 삶을 닮고싶어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우레라 자우끼 다라마 번장,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우레라 자우끼 다라마 번장,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걸어서 갈까, 날아서 갈까, 레쌈 삐리리~


(▲레쌈: 뽕나무 또는 뽕나무 잎
▲삐리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의성어
▲다라: 언덕
▲번장: 고개
▲우레라 자우끼: 날아가는 모습)

굽이굽이 산으로 이어진 나라에 처녀 총각이 짝을 찾기가 힘이 들어 타령을 하는 노래로 우리의 아리랑과 같은 노래다. 뽕나무 잎이 바람에 날려 멀리 언덕과 고개를 넘어 날아가는 모습이 기본 후렴구다.


■박타푸르(Bhaktapur)

박타푸르시는 카트만두 남동쪽에 있다. 865년 라자 아난다 말라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200년 동안 이 계곡에서 가장 중요한 정착지였다. 두르바르 광장에는 1700년에 건립된 옛 궁전이 있다. 보존이 잘된 상태로 남아 있는 이 궁전은 아름다운 목재 조각품과 정교하게 금박을 입힌 금문으로 유명하다. 정문 맞은편 돌기둥 위에는 부파틴드라 말라 왕의 동상이 있다.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광장에는 18세기에 세워진 5층 사원 나자타폴라데와이와 ‘싱가’(singhas·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모습을 한 동상 2개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바이라바 신(神)의 사원이 있다. 지방 박물관이 하나 있어서 옛 목공예 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작은 도시 전체가 유적지로서 사람들의 삶 속에 흡수되어 있는 박타푸르는 네팔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카트만두, 파탄과 더불어 고대 말라 왕조의 세 왕국 중 하나였던 도시로 왕궁과 그 주변의 건축물들이 세계 문화유산(유네스코)으로 지정된 곳이다.

카트만두와 파탄이 빠른 속도로 도시화되고 있는 반면에 박타푸르는 아직까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발전이 더디다. 반면에 18세기 초기에 지어진 목조건물들이 화재 한번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매우 아름답게 보존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현재까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유적지 건물 아래층에서 장사도 하고 살림도 하고 있어 무방비로 훼손이 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나갈코트( Nagarkot)

나갈코트는 히말라야 전망대로 유명한 곳으로 해발 2,164m에 위치한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동쪽 약 35km 떨어져 있으며 차로 약 1시간30분 소요됐다. 게스트하우스와 레스토랑이 있으니 하루 묵으면서 해돋이와 일몰을 감상하려고 계획했으나 카트만두 분지의 스모그가 심해서 포기하고 방문만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랑탕,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능선을 따라 트레킹을 하고 싶었다.


■보드나트(Boudnath) 사원

티벳(Tibet)촌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불탑을 가리켜 Bodh(깨달음)의 Nath(사찰), 즉 보드나트(Boud nath)라 한다. 카트만두(Kath mandu)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7㎞ 가야 하고, 탑 주위에는 티벳 사람들의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지방에 불심이 깊은 자드지모(Jadzimo)라는 노파는 모든 사람을 위한 불탑 하나를 세우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노파는 도축한 소의 살을 저미고 펴는 일을 하는 천민으로, 땅 한 평도 가질 수 없는 신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파는 왕에게 물소 한 마리 살을 펼쳐서 덮을 만큼 땅만 주면 그 땅에 불탑을 세우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왕 역시 소 한 마리의 살을 아무리 얇게 편다 해도 몇 평 정도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과연 노파는 평생 동안 그 일을 한 만큼 면적 백평 이상 지름 100m가 넘는 땅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탄원하며 반대했지만, 왕은 ‘한번 허락한 것은 철회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거부하여 지금의 보드나트 불탑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탑은 단계별로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각각 땅(아래쪽 4층 대좌), 물(반원형의 돔), 불(눈과 13층 첨탑), 바람(우산모양의 구조물), 하늘(꼭대기 첨탑)이다. 특히 탑의 중심부에 그려진 눈은 지혜의 눈이다. 이 탑을 돌때는 반드시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하고, 불교신자들은 <옴-우주><마니-지혜><반메-자비><훔-마음> 즉 ‘옴 마니 반메 훔’을 암송하면서 탑돌이를 한다.



횡단을 마치며

티벳과 네팔 여행을 마친 재미한인산악회 대원들은 트리부반 공항(카트만두)을 통해 떠나고 나만 혼자 남았다. 다시 네팔에 오는 게 쉽지는 않을 터이기에 히말라야 설산에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수년 전부터 꿈 꿔 왔던 이 새로운 도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티벳에서 고소적응을 했던 게 자신감을 주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고 9일 만에 산 아래 동네로 내려왔다. 나는 네팔 바이러스를 심장 깊숙이 묻었다. 아! 그 산위에서 만난 사람들.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던 그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찡그리지 않고 살아나가는 표정에 많은 안도감을 느끼고 왔다. 내 운명이 삐걱거릴 때 겸허히 받아들이려, 그들의 삶을 닮으려, 다시 그 곳으로 가고 싶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가려고 다시 비행을 했다. 25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놀이공원의 탈것 같이 장난스럽다. 시내가 내려다보여 더욱 더 놀이기구를 탄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보니 구름바다 위로 웅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보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수필가 정민디>


네팔의 티벳 불교 사원에서 수도승들이 불교 의식을 치르고 있다. 그들만의 특이한 복장이 이방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계 최대의 불탑 보드나트. 이 탑은 단계별로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에너지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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