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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등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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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아도르 침보라조 등반기


글. 사진. 김명준(재미한인산악회)


7대륙 최고봉 세계 최고령 기록 보유자인 김명준(65)씨가 에콰도르 안데스 산맥의 3개봉 등정을 무사히 마치고 
글과 사진을 보내왔다. 안데스 산맥은 정보가 많지 않지만 미래 한국 산악인들에게 새로운 고산등반지로 
조명 받을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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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흘간 에콰도르 최고봉 침보라조(Chimborazo 6310m)산과 활화산으로 세계최고봉이자 에콰도르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코토팍시(Cotopaxi 5897m)산, 그리고 일리니자(Ilinija Noret 5120m)산을 등반하고 엘에이로 귀환했다. 재미한인산악회 이정현 회장과 둘이 떠난 호젓한 등반이었다. 


적도가 통과하는 에콰도르 수도 키토(Quito)에서 남서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침보라조가 있다. 안데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침보라조는 한때 지구 최고봉이라고 알려졌던 산이기도 하다. 지금도 에콰도르 사람들은 지구 중심점부터는 제일 높은 산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1745년 스페인의 프랑코 에콰도르 탐험대는 침보라조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808년 히말라야의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m)가 발견되므로 이 주장은 틀린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지금도 일부 에콰도르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 지구 중심인 코아(핵)부터 잰다면 침보라조가 제일 높다는 주장이다. 적도는 남북극보다 좀 더 큰 타원형이고 적도가 통과하는 에콰도르 침보라조가 그러므로 가장 높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 표준은 해발로부터 산의 높이를 재는 것이고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임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침보라조와 코토팍시는 수도인 키토에서 당일로 등반의 들머리인 산장까지 이동 할 수 있다. 등반 소요 시간이 짧고 비교적 쉽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온다. 침보라조를 오르기 위하여 고소적응 차 주변의 산들을 오르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 산을 오르면서 원주민들의 삶을 구경하는 것도 또한 이 산군 등반 재미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에베레스트와 남극 북극점을 서 보았으므로 적도에도 서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침보라조를 등반하기 위해 고소적응 훈련 차 마운틴 휘트니(4417m)를 두 번 올랐다. 회원들은 히말라야도 올랐는데 침보라조 쯤은 쉽게 오를 거라고 믿는 듯 했지만 세상에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낮고 쉽다는 산을 오를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하며 어느 산이나 힘들기는 항상 마찬가지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12월 4일 재미한인산악회 회원들이 만든 환송회를 끝내고 오전 1시 LA에서 파나마 시티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에콰도르 수도 키토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오후 2시 도착했다. 미리 연락 된 가이드 회사에서 마중 나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키토는 해발 2700m 고도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 한쪽은 피친차(pichincha) 화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푸른 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엔 화산이 많다. 


호텔에서 나와 주변 관광을 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성당과 유적지를 보려고 올드타운으로 가려했는데 치안이 불안하다하여 택시를 대절하여 3시간가량 관광을 했다. 다음 날이 수도 건립 기념일이라 축제를 하느라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 트럭에 가득 탄 밴드에 맞춰 춤을 추고 경적을 울려대며 시내를 행진한다. 축제란 어느 나라나 같은 모양이다. 

마치 통행금지가 유일하게 풀리던 60년대 한국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킨다. 그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밤새워 명동이나 번화가로 밀려 다녔던가. 중심가에는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에콰도르 젊은이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축제를 즐기고 있다. 또 하나 이채로웠던 것은 미국의 달러를 공용화폐로 쓰고 있는 점이다. 7년 전부터 1달러 미만의 동전을 자국 화폐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적도가 지나는 나라답게 낮엔 반팔 티셔츠로 충분했으나 해가지면 날씨가 매우 쌀쌀하여 두툼한 옷을 입게 된다. 내일은 등반 

출발일. 컨디션 조절을 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방안가지 들리는 축제의 소음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기상하여 근처를 산책하며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우리를 데리러 온 가이드의 픽업을 타고 일리니자(Ilinija Noret 5120m) 산을 향해 출발했다. 가이드 역할은 네팔의 세르파에 같았다. 운전은 물론 산장 예약과 등산로 안내와 식사까지 책임졌다. 에콰도르 자체가 개발도상국이지만 산을 향해 가다보니 우리 어렸을 적 힘들었던 시절 같아 보여 정겹게 느껴진다. 낡아 버린 많은 자동차가 뿜어대는 매연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대 기아차가 많이 보여 물어보니 현지인에게는 인기가 최고라 한다. 

차로 해발 4100m까지 올라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주차시키니 12시였다. 곧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등산로를 따라 여유롭게 걷다보니 4710m에 산장이 나타난다. 고소 적응을 위하여 산장 위쪽으로 30여분 더 오르다 다시 내려왔다. 산장엔 난방 시설과 취사용 가스도 준비되어 있는 등 생각보다 훌륭하다. 가이드는 나름대로 여러 종류의 음식을 준비해 왔으나 입맛에 맞지 않아 우리가 준비한 우동으로 저녁을 때웠다. 

입맛이 없는 건 물론 고소가 주는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산장에는 알라스카 산악구조대원 6명과 유럽의 산악인 4명이 있었는데 그들도 내일 우리와 함께 정상을 오를 것이다. 고소 탓이겠지만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5시 50분경 산장을 출발했다. 체력을 위하여 무엇이든 먹고자 노력했으나 겨우 사과 반쪽만 넘길 수 있었다. 두 시간 남짓 걸린 7시 40분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짧은 등반이었으나 일부 구간은 급경사와 함께 클라이밍도 필요했다. 

지난여름에 올랐던 마터호른을 생각나게 한다. 침보라조 등반 적응을 위해 가벼운 고소훈련으로 생각한 것이 틀렸다. 역시 산은 높은 곳이나 낮은 곳 가릴 것 없이 힘들다. 정상에서 20여분 머물다 하산했다. 한 시간 가량 걸린 하산 중에 유럽인 노부부를 만났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인데 은퇴 후 세계 여러 나라의 명산을 찾아 등반을 즐기는 중이라 말한다. 부인은 고소증 때문에 결국 정상을 포기하고 만다. 

나도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이들처럼 등반을 하며 세계의 명산 순례를 하고 싶다. 남편에게 “당신은 나의 롤 모델(Role Model)이다”라고 존경의 말을 건넸더니 귀국 후 이 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올드 모델(Old Model)에 불과하다”고 겸손해 하며 오스트리아로 초대한다. 함께 알프스를 등반 하자는 말이었다. 이 부부는 다음 날 코도팍시에서 또 함께 등반했는데 이번에는 남편까지 고소증이 와 바로 정상 밑에서 포기했다. 그들 부부는 며칠 후 침보라조에서 또 만났다. 정말 닮고 싶은 노부부였는데 역시 산악인들은 국적을 떠나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다. 키토 호텔로 귀환하니 오후 3시였다. 


다음 날 휴식도 없이 해발 5897m의 코토팍시로 출발했다. 코토팍시는 진행을 멈춘 화산으로서 키토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곳이었는데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보다 조금 더 높다. 에콰도르 국민들에게 신성시 되는 산이기도 하며 산전체가 국립공원에 귀속되어 있었다. 공원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4600m지점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장을 향해 걸었다. 유명한 산답게 산악인들이 많이 보였고 4800m의 산장 역시 시설이 훌륭했다. 


자정 쯤에 출발하기 위하여 오후 6시경 자리에 누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12시쯤 일어나 더운 국물만 마시고 오전 1시에 등반에 나섰다. 30여분쯤 올라가니 빙하가 나타났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3명이 한 조를 이루어 안자일렌을 했다. 앞뒤의 헤드램프 불빛에 의존하여 가파른 설벽을 지그재그로 올랐다. 힘이 들었다. 헤드램프에 비치는 발끝만 보며 얼마나 올랐을까. 날이 밝아오고 사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경사각은 더 가팔라졌다. 

급경사에 여기저기 크레파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옆으로는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새삼 긴장이 되며 은근히 하산 길이 걱정 된다. 다행히 날씨는 아주 좋다. 드디어 힘든 오름짓이 끝나고 정상이 나타났다. 7시 30분이었다. 편평한 정상부 안쪽으로 분화구가 무섭게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다. 멀리 안데스 준령들이 하얀 눈을 쓰고 둘러 서 있는 파노라마 풍경이 기막히게 좋았다.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신성하게 여기는 까닭을 알 것 같다. 위험한 구간을 벗어나자 눈이 크러스트가 되어 있지 않아 하산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산장까지 귀환한 시간은 1시간 50분 정도. 이로서 침보라조 등반을 대비한 고소훈련은 모두 끝났다. 


키토의 호텔로 가는 대신 유명한 휴양지인 바노(Bano)로 향했다. 가다 보니 분화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작년 이곳에서 화산이 폭발해 도로가 유실되었고 그 복구공사가 한창인데 연기를 보니 화산 지대임이 실감난다. 바노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등반에 찌든 몸을 노천 온천에 담갔다. 앞산에 걸린 커다란 폭포 등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보며 온천을 하니 그 동안의 피로가 다 풀리는 듯하다. 침보라조를 앞두고 모처럼 한가하게 망중한을 즐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공기가 상큼하다. 아침을 먹은 후 산책에 나섰는데 등산로가 마치 정글처럼 밀림이다. 재래시장 구경과 몇 군데 명승지를 둘러봤다. 바노는 작은 도시이기에 한 시간 정도면 둘러 볼 수 있다. 이제 내일이면 최종 목표인 침보라조 등반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튿날 우리를 데리러 온 가이드의 차에 올라 출발했다. 침보라조의 정상부는 마르티네스봉(6,000m) 베인티미자봉(6,290m) 에드워드 윔퍼봉(6,310m)의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 첫 등정의 명예는 스위스의 마터호른을 초등한 유명한 등반가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에게 돌아갔다. 그와 두 명의 스위스 가이드 등 3명이 남서면으로 도전, 1880년 초등에 성공했다. 최고봉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등반 기점이 되는 산장에 도착하니 열 명 남짓한 산악인이 보인다. 커다란 산장에 비해 사람의 수가 적었다. 코도팍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모두 내일 있을 등반에 긴장하는 눈치다. 저녁 식사는 생략하고 7시부터 자리에 누웠다. 긴장 때문인지 고소 덕분인지 역시 잠이 안 온다. 뒤척이다 11시 50분경 산장을 떠나 등반길에 나섰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 헤드램프를 켜고 서너시간을 오르니 등반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결코 침보라조가 만만한 산이 아니라는 정보를 알기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르다 보니 빙벽을 만났다. 별로 길지는 않았으나 안전을 위하여 서로 빌레이를 보며 통과했다. 고도를 올리며 함께 줄을 묶은 이정현 회장도 몹시 힘드는 듯하다. 


가이드는 오전 8시까지는 무조건 정상에 서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이 어디든 철수를 할 것이며, 그 이유는 기온이 올라가면 숨은 크레바스가 녹아 하산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7시가 지나자 산장에서 먼저 출발했던 한 팀이 등정을 끝낸 후 내려온다. 우리 뒤에도 3개 팀이 따르고 있다. 가파른 경사각인 설벽을 두 군데쯤 지나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경사각이 죽는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몸에 묶은 로프와 함께 몸이 옆으로 쏠린다. 8시에 우리는 침보라조 정상에 섰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엎드리다 시피 몸을 낮춰야 했다. 정상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꺼냈으나 언 탓인지 작동을 안 한다. 몸에 품고 왔어야 했는데 배낭에 넣은 게 잘못이다. 

바람을 피하여 곧바로 하산하여 10여분 내려왔다. 바람이 죽으니 온도가 올라갔는지 이제 카메라가 작동 된다. 그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오를 때는 어두워 못 보았는데 하산하며 보니 위험한 구간이 많이 보였다. 크레바스도 있고 낙석 위험도 있었다. 하산 길은 몹시 힘들었다. 등반을 시작한 이후 먹은 것이라고는 더운 꿀 차 한 잔이 전부였다. 발이 풀려 한발 딛기가 힘들다. 안전지대로 내려서니 긴장도 풀려서 인지 정말 힘들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내가 산장으로 귀환했다. 시내로 내려와 점심을 먹다가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작년 칼스텐트 등반 때 만나 함께 등반 한 시카고에 사는 톰이었다. 톰은 내일 침보라조를 오른다는 것이다. 지구의 오지에서 두 번씩이나 만난 것을 보며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신발을 벗으니 엄지발톱이 검정색으로 변했다. 동상은 아니고 쉴 새 없이 밀어 붙인 등반에서 발을 혹사 시킨 탓 일거다. 그러나 그쯤 무슨 대수랴. 아무 사고 없이 계획한 3개봉 등반을 마친 마음은 홀가분했다. 키토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LA로, 이정현 회장은 단독으로 남미 최고봉 아콩카쿠아를 오르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그리고 힘든 등반 끝에 정상에 섰다고 알려왔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고 등반력인데 그 소식에 내가 오른 것처럼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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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봉에 함께 오른뒤     남미 최고봉인 Acconcagua(6,962m, 22,835ft)에 단독으로 정상에 오른 이정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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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에베레스트 등반 캠프에서 김명준, 이정현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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