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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등반지

글: 신영철회원

 

 

 

죽음의 산’두번째 도전은 ‘신의 뜻’


소설가이며 재미한인산악회 회원인 신영철씨가 작년 여름 糖뻑燦?K2봉과 발토르 빙하를 성공적으로 등반했습니다. 
신씨의 등반기를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길떠남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한다. 높이로는 세계 두번째지만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오르기 어려워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는 별칭이 붙은 아득한 K2(8,611m)봉. 그곳에 이르는 길은 멀고, 깊고, 높고, 험했다. 그럴 것이 세계에서 제일 긴 발토르 빙하 끝에 그 산이 서 있었으니까. 지구의 오지를 찾아가는 트레커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다는 K2봉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만큼 기대와 설렘이 컸다. 





그러나 이 길은 처음이 아니다. 
그 길을 갔다 온 것이 십년도 훨씬 지났지만 그 삭막하고 황량한 풍경은 묘한 매력으로 늘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그곳에 이르는 시간은 계절을 거꾸로 가는 길이다. 파키스탄의 살인적인 더위에서 고도를 올리다 보면 봄, 가을을 지나고 빙하를 거슬러 영원한 겨울에 도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햇볕 따갑겠지만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입고 눈과 얼음 속에서 그 더위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상상에 설레었다. 

들뜬 마음으로 출국하기 위해 배낭을 챙기는 동안 우리가 도착해야 할 파키스탄에 변수가 생겼다. 수도 이슬라마바드 시내의 랄마스지드(붉은 모스크)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10여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끝났다면 여정에 별 문제가 없겠으나 사태는 심각했다. 모스크 안에 결사투쟁을 선언한 사람들이 대거 운집해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성직자들과 학생들이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 동안 계획했고, 좌석이 없어 힘들었던 비행기 표까지 확보한 이상, 파키스탄 정부가 계엄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취소할 수는 없었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면 재빨리 시내를 벗어나 계획한 K2봉으로 가자. K2봉을 가기 위하여 통과할 발토르 빙하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겠지. 산골은 어느 나라나 후덕한 인간애가 존재하는 곳이니까.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정도가 출발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 팀은 사진작가 두 명을 합쳐 세 명의 단출한 일행이었다. 한 달 여정으로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것은 7월10일 새벽이었는데 맙소사.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바로 그 날이 유혈의 날이었다. 붉은 모스크는 우리 호텔에서 불과 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살벌한 공항검색을 통과해 호텔로 가는 차안까지 간간이 포성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있었다. 호텔 방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은 심각했다. 정부 대변인은 “항복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사살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탈레반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신념으로 무장된 붉은 모스크 성직자는 한 술 더 뜬다. “우리의 붉은 피로 이슬람 혁명이 촉발될 것이니까 기꺼이 순교할 것이다.” 죽인다! 그래, 죽겠다! 이런 험한 말들은 파키스탄 입국 인사치고는 끔찍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그저 호텔에서 TV만 지켜볼 뿐이었다. 파키스탄을 쿠데타로 장악한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부군은 TV에서 말한 약속을 지켰다. 붉은 모스크를 점거한 채 일주일 남짓 대치해온 이슬람 원리주의 학생, 성직자 등 무장세력을 우리가 도착하는 날 TV 생중계까지 하며 강제 진압했다. 
우리가 도착한 그 날, 결국 102명이 숨지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생중계로 목격한 것이다

우리가 고용한 파키스탄 가이드 이름은 이크발이었다. 일련의 사태에 따라 불안해하는 우리 마음을 눈치 챘는지 한 마디로 함축한다. “인샬라” 
앞으로 지겹게 듣고 또 따라해야 할 ‘인샬라’의 뜻은 ‘신의 뜻대로’라는 말이다.
이슬라마바드는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였고 어제의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어찌되었던 빨리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관광성에 K2 입산 브리핑을 끝내고 허가증을 받았다. 
더 다행인 것은 파키스탄 북부 등산 기점인, 스카루드 가는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 기억은 이 비행기 표를 꼭 필요로 했다.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하면 무조건 25시간 이상 대절 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길 이름은 카라코람 하이웨이(KKH)였으나, 말만 고속도로지 거의 공포 수준의 길이다. 하이웨이는 영어가 얼마나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지 내게 각인시켜준 단어였다.

그러나 까마득한 옛날에도 이 길은 있었고 그때는 하이웨이보다 더 부드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실크로드. 비단 길. 고소증에 어지러운 히말라야 고갯길을 넘어 인더스 강 따라 타박타박 걸었던 길이 이름만 말랑한 비단 길이다. 아득한 협곡의 등산길을 중국의 도움으로 1962년부터 76년까지 포장도로로 만든 것이 KKH였다. 

실크로드라는 어감이 주는 표면 고른 고속도로라 생각하면 크게 속는다는 것이, 16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얻은 교훈이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구정양장 인더스 거센 물결을 따라, 단애의 절벽 길 따라, 바퀴가 까마득한 절벽 경계선에 물리는 스릴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뿐일까. 말만 비단결 고속도로인 KKH는 예측할 수 없는 산사태와 계곡물의 범람으로 종종 끊어지기 일쑤였다. 

거기에 비행기를 꼭 타야 할 이유 두 개를 덧붙이자면, 운전사의 초인적 노동을 들 수 있다. 꼬박 밤 새워 장장 25시간 이상을 홀로 곡예 운전하는 모습 자체가 공포였다. 남은 하나는, 혹시라도 극렬 무슬림 원리주의자에게 잡힐 인질에의 공포였다. 길의 중간 중간에 앞서 말한, 붉은 모스크 사태의 종파인 원리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비행기는 간절한 탈 것이 되었다.

이튿날 새벽, 스카루드로 떠나기 위해 비행장으로 나섰다. 겹겹의 보안검색을 통과하고 보딩 패스를 받았다. 9시30분 출발하는 하루 한 편의 비행기만 타면 불과 한 시간만에 스카루드에 도착할 것이다. 이제 우리를 괴롭혔던 무더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제 도착할 스카루드 고도는 2,000m가 넘으니 가을처럼 선선할 것이었다. 

느긋하게 대합실 매점에서 짜이를 한잔 청해 마셨다. 쓸데없는 상념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출발 시간이 지나도 탑승하라는 방송이 없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차올랐다. 결국 듣고 싶지 않은 안내방송이 나왔다. 캔슬! 다른 설명도 없다. 현지인들은 그런 경우에 적응이 된 탓인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선다. 
동행한 가이드 이크발을 바라
보니 그가 또 한마디 한다. “인샬라”. 이 말은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 앞으로 한 달을 버틸 지침이 될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며 오기를 부렸다. 내일 한 번 더 시도해 보자. 내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면, 그때 공항에서 차를 대절하여 출발하자. 그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튿날 역시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우리는 보딩 패스를 신경질적으로 휴지통에 넣었다. 미니버스를 대절하여 짐을 싣고 악명 높은 KKH를 마차와, 당나귀와, 낙타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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