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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의 명상 수행법
 글 쓴 이 : 대원
티베트불교의 명상 수행법


 

티베트 불교수행법 - ‘람림’

티베트 불교수행의 탁월한 점은 ‘람림(Lam-rim)’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람림’은 티베트어인데, ‘람’은 수행법, 길이라는 의미이고, ‘림’은 단계라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으로 이끄는 단계적인 수행’을 ‘람림’이라고 합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람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042년에 티베트에 온 인도스님 아티샤가 쓴 『람된(lamdon)』, 즉 『보리도등론( 菩提道燈論)』이라는 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책은 수행의 정수를 적은 것입니다. 그 후로 이 책에 대한 주석서가 제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습니다. 15세기초에 총카파 스님이 쓴 『람림첸모(lam-rim chen-mo,보리도차체론(菩提道次第論)』이라는 방대한 저서까지 포함해서, 유명한 람림주석서만 8가지가 넘습니다. 보리심을 일으켜서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부터 시작해서 수행법을 단계별로 적은 책의 형식을 람림이라고 말합니다. 티베트 불교의 4가지 중요한 종파들, 즉 닝마파, 까규파, 샤캬파, 겔룩파가 모두 ‘람림’이라는 형식의 수행지도서를 갖고 있습니다. ‘람림’의 내용은 아티샤스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는 수행법이며, 소승과 대승의 모든 수행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입니다.


아티샤 스님의 제자들이 이룬 종파인 ‘까담파(Kadampa)’ 수행자들은 신통력이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보다 람림을 수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많은 생애를 거쳐서 윤회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신통력들을 얻은 적이 많았을 것이고, 신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적도 많았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고 분노와 집착과 질투와 혼돈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람림을 깊이있게 수행한다면, 골칫거리들이 생겨날 여지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런 골칫거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람림’은 명상할 내용을 단계별로 제시합니다.

명상의 필요성

명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티베트어로는 ‘명상’을 ‘곰(gom)’이라고 합니다. ‘곰’은 익숙해진다는 말입니다. 명상은 마음을 미덕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이 미덕에 익숙해지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평화스럽습니다. 마음이 평화스러울 때는 걱정이 없고 정신적 불안감이 없고 행복을 느낍니다. 마음이 평화스럽지 못할 때는 아무리 좋은 외부환경 속에 있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훈련을 하면, 항상 행복을 느낄 것이고, 극히 나쁜 상황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분석적 명상(觀)’과 ‘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멈추는 명상(止)’입니다. 우리가 배운 불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때는 ‘분석적 명상’을 합니다. 그 가르침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 어떤 결론에 이르거나, 덕이 있는 마음상태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멈추는 명상’의 목적입니다. ‘분석적 명상’을 통해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숙고한 후, 그 대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춰 집중합니다. 이렇게 초점을 맞춰 집중하는 것을‘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멈추는 명상’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멈추는 명상’을 말하고, 분석적 명상법은 단순히‘숙고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숙고한 후에야‘한 대상에게 마음을 멈추는 명상’이 이루어지고, 불교에 대해 읽거나 들은 후에야 불교에 대해서 숙고합니다.

처음에 명상을 시작할 때는 집중력이 매우 약합니다. 쉽게 산만해지고, 무엇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지도 종종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각 명상기간마다 ‘분석적 명상’과 ‘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멈추는 명상’을 자주 번갈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비심에 대해 명상한다면, 중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고통에 대해 숙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음 속에 강한 자비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에 초점을 맞춰 명상합니다. 그 느낌이 희미해지거나 마음이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느낌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분석적 명상을 합니다. 그 느낌이 회복되면 분석적 명상을 일단 접어놓고, 그 느낌에 초점을 맞춰 집중합니다.


‘숙고’와 ‘명상’은 둘 다 마음을 덕스러운 대상에게 익숙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대상들에게 익숙해질수록 마음은 더 평화스러워집니다. 명상을 하고, 명상하는 동안 개발된 통찰력과 결단력에 일치하는 삶을 살면, 평화스러운 마음을 유지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명상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덕있는 것은 무엇이든 명상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대상에 익숙해질 때 마음이 더욱 평화롭고 덕스러워진다면, 그 대상은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면, 그 대상은 부덕한 대상입니다. 많은 대상들은 중성적이며, 우리 마음에 특별히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명상의 대상들이 많지만, 가장 의미있는 것은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생각하는 명상이나, 정신적 스승에게 의지하는 명상이나, 자연의 궁극적인 성질인 공성(空性)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자격있는 스승을 통한 명상수행

불교 수행을 시작하려면 자격있는 정신적 스승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스승의 자비심을 통해서 제자는 수행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일으키고, 단계별로 이루어진 수행들을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 안내자에게 의지하는 명상이 필요합니다. 티베트에서는 그것을 ‘구루요가(Guruyoga)’라고 부릅니다. ‘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스승이라는 말이고, ‘구루요가’는 스승의 순수한 몸과 말씀과 생각이 나의 몸과 말과 생각이 되어 스승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명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밀교 수행에는 구루요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스승에 대한 완전한 신뢰 속에서 ‘나’라는 생각에 매달리는 아집을 버리고, 스승과 내가 일치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도 지도와 안내서를 미리 보고 여행을 하면, 시간을 절약하고 길을 잃어 헤맬 염려가 없는 것처럼, 정신적 여행인 수행의 길을 갈 때도 지도와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도와 안내서가 없어도 좌충우돌하며 여행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중요한 곳을 모르고 스쳐가든지, 필수적인 곳을 생략하고 지엽적인 것들만 보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스승은 이미 그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여행안내자와 같습니다. 훌륭한 안내자는 여행자로 하여금 스스로 체험하게 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줍니다. 우리의 생애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암중모색하며 홀로 길을 찾으며 지엽적인 곳만 헤매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스승은 수행이라는 여행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에게 귀의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려는 결심과 스승과 하나가 되는 마음자세가 수행의 근본조건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수행한다고 하면, 스승이 누구냐고 먼저 묻습니다. 어느 절에 다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우리 절 남의 절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스승이 계시는 절이 아니더라도, 절이 있는 곳에는 종파에 상관없이 어느 절에나 참배하고 공양물을 올립니다. 자신의 스승은 특정한 종파에 속한 분이지만, 스님들이 계신 절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하는 곳이니 공양을 바쳐야 한다고 티베트인들은 생각합니다.


불교를 가르칠 때는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귀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실제로는 스승,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높은 경지의 불교수행자(승가)에게 귀의하는 사귀의(四歸依)입니다. “라마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말로 기도문을 시작합니다. 스승의 몸과 말씀과 마음은 불법승 삼보가 인간의 몸을 통해서 구현된 것이기 때문에 스승 속에 불법승 삼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스승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게 불교를 가르쳐주신 분들은 모두 스승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밀교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입문식을 내게 해주시고 그 수행을 가르쳐 주신 분을 ‘근본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스승을 고를 때는 스파이가 몇 년을 두고 사람을 관찰하듯이 스승 후보를 유심히 살피라고 합니다. 그 스승이 가르치는 내용과 그분의 실생활이 일치되는 지 유심히 살피고, 그 가르침이 불교 경전에 의거하고 있는 지를 살피며, 그 분의 실제적 수행과 명상에서 나온 가르침인지를 검사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 분이 가르친대로 수행하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 그분께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일단 스승이 정해지면, 스승의 말씀을 부처님 말씀처럼 받들고 따라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면, 스승의 지혜가 제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가르침을 담을 그릇이 제자 속에 준비된 순간에 그 지혜가 전해집니다. 그때까지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주저없이 물어야 합니다.

명상수행은 왜 필요한가

다음 단계는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난 기회가 얼마나 드물고 귀중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생애에 불법을 듣고 명상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주어진 기회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갖고 태어난 것을 당연한 일처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다음 생에는 인간의 몸을 받을지, 아니면 과거의 어느 생에선가 지은 잘못의 과보로 인간이 아닌 다른 중생의 몸으로 태어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서 두려워하지만, 티베트 사람들의 경우에는 다음 생에 어떤 중생의 몸으로 태어날 지를 몰라 두려워합니다. 윤회를 철저히 믿는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 생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인정한다면, 의미없는 행동들을 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태어난 후 20년 동안은 학교공부하고 입시 공부에 쫒겨서 명상하거나 수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후 다시 20년 동안은 사회생활의 기반을 잡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고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돈벌어놓고 나이 들면 편안히 쉬면서 명상하고 수행해야지 하며 미루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은, 늙고 힘든데 무슨 수행이냐고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눈, 귀, 코, 입, 육체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에 전념하다가 지치고 병든 몸으로 이 세상에서 밀려나듯이 떠나가 버립니다.


이런 저런 세속적인 관심사 때문에 핑계를 대고 수행을 미루는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는 죽음과 삶의 무상함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큰스님들을 찾아가서 무엇을 명상할 것인지를 여쭤보면, “무상”에 대해서 명상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항상 변한다는 그 사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제가 언젠가 저의 스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이 다 무상하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제 눈을 바라보시면서 “세상이 무상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네 자신이 무상한 게 문제다. 네가 무상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저는 그때 스승의 한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적절하게 인도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스승을 믿고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이 제자에게 있고, 제자를 인도하려는 강한 자비심이 스승께 있기 때문에 서로 공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불교 수행을 한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육도윤회(六道輪廻) 중의 삼악도(三惡道)인 지옥과 짐승세계와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는 위험에 대해서 명상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혹자는 지옥이란 상징일 뿐이고 심리적인 차원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우리 육안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 자체의 세계에서는 끓는 물에 튀기는 고통, 얼음 지옥에서 얼어붙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갖고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념체가 당하는 고통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현미경으로 볼 수 있기에 존재한다고 인정되는 아주 작은 미생물들을 현미경이 없던 옛날에는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세계들을 이 육체로는 경험하지 못하지만, 지옥은 다른 형태의 세계에서 중생이 겪는 고통임에 틀림없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의 신통력으로는 지옥세계가 보인다고 합니다. 지옥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세계가 무상하고, 절대적인 의미로 보면 인간세계가 공성이지만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세계나 아귀세계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나 짐승의 세계에 태어나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느라고 전 생애를 보내다 죽고 말기 때문에,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상태를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여지가 없습니다. 신들의 세계는 무엇이든 풍부하고, 무엇이든 생각하는 대로 즉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아만이 쌓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들의 세계가 인간계보다 행복해 보여도, 신의 세계에 사는 기간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공덕으로 신의 세계에 태어났어도 그 과보가 끝나면 다시 육도의 어딘가로 떨어져 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티베트 수행자들은 신의 세계에 태어나 과보로 일시적인 즐거움을 향락하고 다시 윤회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 때 열심히 수행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를 기원합니다.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에 진지하게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믿고 의지하며, 부정적인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하지 말고, 다른 중생들을 돕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해야겠다는 발심을 하게 됩니다. 부도덕을 피하고 미덕을 실천하면 삼악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다음 생애에 계속해서 불교 수행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춘 귀중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지옥이나 아귀 세계 등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상상해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원한 자유의 상태인 열반을 얻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키려면 인간과 신들의 세계의 고통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고통만 반복되는 어리석은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있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이 용기는 완전한 해탈을 얻을 때까지 수행을 밀고 나갈 원동력이 됩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중생들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마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려면, ‘보리심(菩提心)’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보리심은 중생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얻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지를 근절시키고 온갖 장애를 제거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얻으려면, 보리심이라는 착한 마음을 갖고 “고요히 머뭄(지(止))”과 “특별한 통찰력(관(觀))”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이들 외에도 명상할 대상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에 관해 명상하고 싶으면, 남의 고통을 내가 받고 내 공덕을 남에게 준다고 상상하는 명상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티베트 불교에서 명상 수행을 시작할 때 누구나 거쳐야할 기본적이고 중요한 기초가 되는 명상들입니다.


그러면 명상하고 싶다는 열망은 어떻게 일으켜야 할까요? 우리는 물질적이거나 감정적인 안정감을 찾는다거나, 감각적 쾌락을 즐긴다거나, 좋은 평판을 얻는다거나 하는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런 것들은 잠시동안은 행복한 느낌을 주지만, 우리가 바라는 깊고 오래 지속되는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 나를 행복하게 만족시켰던 것이 잠시 후엔 내게 불만을 일으키고, 나는 더 큰 만족을 기대하며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세속적 쾌락은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집착과 질투와 좌절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세속적 쾌락에서 진정한 충족을 찾을 수 없다면, 어디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행복은 마음의 상태이므로, 행복의 진정한 근원은 마음 안에 놓여있는 것이지, 외부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평화롭다면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하지만, 우리 마음이 불순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아무리 외적 조건을 변화시켜도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목적은 평화와 행복으로 이끄는 마음의 상태들을 기르고 그렇지 못한 상태들을 근절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짐승들은 음식과 성행위를 즐기고, 거처를 발견하고, 음식을 저장하고, 적들과 싸워 물리치고, 자기 가족을 지킬 수는 있지만,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고 영속적인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귀중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짐승들도 얻을 수 있는 결과만을 얻는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진정한 목적을 완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불교수행을 실천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명상의 목적

명상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람림’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명상하게 되는 동기를 세 가지 수준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수준은 초심자의 동기입니다. 다음 생에 태어날 때 불교수행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갖춘 귀중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장하며, 삼악도에 태어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것이 첫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수행동기입니다.


둘째 수준은, 중간 정도의 사람들의 수행동기입니다. 윤회에서 해탈하기를 목표로 하며, 업력에 끌려다니며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윤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것이 이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수행동기입니다.


셋째 수준은, 높은 수준의 사람들의 수행동기입니다. 모든 중생들을 도울 수 있는 완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수행동기입니다.


이 세 가지 수준의 동기는 점진적입니다. 첫째 범주의 동기에서 수행하면서, 둘째 수준으로 나아가는 기초를 쌓고, 중간 범주의 동기로 명상을 하면서 셋째 수준으로 나아가는 기초를 쌓습니다. 이 세가지 동기 중의 하나를 사람마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동기가 발전되어서 더 큰 안목으로 수행의 동기를 찾아가는 단계를 말합니다. 겔룩파의 종조인 총카파 스님의 <람림첸모>라는 책은 람림 수행의 이 세 가지 단계별로 수행해야할 명상의 대상이나 태도를 자세히 적어놓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보리도차제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나와있기는 하지만, 중국어 번역본을 가지고 연변에 사는 조선족사람이 번역해놓은 것이라서 한국말이라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보리도차제론』을 완역한 영역본도 아직은 없지만, 지금 여러 명이 나누어서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명상법

명상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배경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다음에 설명될 명상법들은 환생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과 환생의 과정과 우리가 태어날 수 있는 곳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은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순전한 육체적 진행과정의 부산물도 아닙니다. 마음은 육체와는 별개인 형체없는 연속체입니다. 육체가 죽음의 순간에 해체될 때, 마음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얕은 차원의 의식적인 마음은 소멸되지만, 그 소멸은 더욱 깊은 차원의 의식인 매우 미세한 마음 속으로 용해됩니다. ‘매우 미세한 마음의 연속체’는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습니다. 이 매우 미세한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면 그것이 부처님의 전지전능한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우리의 미세한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각각의 흔적은 나중에 그것의 결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마음은 밭과 같고, 행위는 그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덕스러운 행동들은 미래의 행복의 씨를 뿌리고, 부도덕한 행동들은 미래의 고통의 씨를 뿌립니다. 우리가 과거에 뿌려놓은 씨앗들은 그것들이 싹트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모일 때까지 잠자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의 행동이 행해진 뒤 많은 생애가 지난 뒤에 싹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에 싹튼 씨앗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씨앗들이 우리가 다음에 태어날 환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싹트는 특정한 씨앗은 우리가 죽을 때 갖는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으면 미덕의 씨앗을 촉진시켜서 다행스러운 환생을 맞게 될 것이고, 평화롭지 못하거나 화난 마음의 상태로 죽으면 부덕한 씨앗을 촉진시켜서 불운한 환생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잠들기 직전에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악몽을 꾸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죽음은 잠드는 과정과 아주 비슷합니다. 두 경우 모두, 깨어있는 상태에서 가진 거친 마음이 미세한 마음 안으로 용해되고, 그 후에 오는 것은 꿈의 방해를 받지 않는 무의식 상태의 기간입니다. 그 후 에너지의 움직임이 미세한 마음과 결합해서 꿈이 일어납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마음과 거친 육체적 몸이 여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꿈이 끝난 후에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연결이 완전히 끊깁니다.


죽음 이후에 49일 동안 의식은 꿈과 같은 상태에서 방황하는데, 이것이 중음의 상태입니다. 티베트말로는‘바르도(bardo)’라고 합니다. ‘바르도’는 중간이라는 뜻입니다. ‘바르도’는 영어로도 번역이 되지 않고 영어사전에 그대로 실리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대사전에 처음으로 실린 티베트어라고 합니다. ‘김치’가 영어로도 ‘김치’이듯이 ‘바르도’는 그 특정한 상태를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바르도‘ 기간 중에 경험하는 다양한 환상들은 우리의 죽음 직전에 활성화된 업의 씨앗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씨앗들이 활성화되었다면 그 환상들은 악몽과 같을 것이고, 긍정적인 씨앗들이 활성화되면 환상들은 매우 유쾌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업의 씨앗들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 그것들이 사람을 재촉해서 육도윤회 중의 하나 속으로 환생하게 만듭니다.


육도는 우리가 환생할 지도 모를 실제적인 장소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동의 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며, 몸으로 하거나 말로 하는 행위들은 마음의 의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말해서 육도는 우리 마음이 만듭니다. 예를 들어, 지옥세계는 살인이나 극도의 정신적 육체적 잔인함이 깃든 최악의 행동을 한 결과로서 일어납니다. 그런 행동들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육도의 영상을 마음에 그리려면, 크고 낡은 집의 각층들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집은 윤회를 표상하며 평범한 중생들이 선택하거나 억제하지 못하고 당해야만 하는 죽음과 환생이 순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집은 지상에 3층이 있고, 지하에 3층이 있습니다. 혼란한 중생들은 이 집의 거주자들에 비유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아래 위층을 옮겨다니는데, 때로는 지상에 살고 때로는 지하에 삽니다.


지상 1층은 인간세계에 해당됩니다. 지상 이층은 반신(半神)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중생인데 끊임없이 신들과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인간보다 월등한 힘과 부유를 누리지만, 질투와 폭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정신적인 가치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지상 3층에는 신들이 삽니다. 낮은 부류의 신들인 욕계의 신들은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지만, 그들의 욕망을 즐기고 만족시키는 일에 시간을 바칩니다. 그들의 세계는 천국이고 긴 수명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불사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낮은 세계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정신을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은 불교를 수행해야겠다는 동기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 훨씬 값진 것입니다.


욕계(欲界)의 신들보다 높은 것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신(神)들입니다. 감각적 욕구를 벗어나 있는 색계의 신들은 명상을 통한 몰두, 즉 선정에서 오는 고상한 희열을 경험하며, 빛으로 이루어진 몸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미세한 몸조차 초월한 무색계의 신들은 무한한 공간을 닮은 미세한 의식 속에서 형상없이 머뭅니다. 그들의 마음은 윤회 세계 중에서는 가장 순수하고 고상하지만, 그들은 윤회의 근원인 아집이라는 무지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겁 동안에 희열을 즐긴 후에 그 세계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낮은 세계의 윤회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과거에 쌓아놓은 공덕을 소비하면서 살고 있고, 정신적인 진보를 거의 이루지를 못합니다.


지상의 세 층들을‘행복한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서 겪는 경험들이 과거에 미덕을 행한 결과로 받는 것이므로 비교적 즐겁기 때문입니다. 지하에 있는 세 개의 낮은 세계들은 부정적인 몸과 말과 생각으로 행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고통이 작은 것이 짐승의 세계인데 이 비유에서는 지하 1층에 있습니다. 이 세계에 속한 것은 인간이 아닌 모든 포유동물들과 새들, 물고기, 곤충, 벌레 등을 포함한 동물의 왕국 전체입니다. 그들 마음의 특성은 극단적인 어리석음이며 아무런 정신적인 각성이 없고, 그들의 삶의 특성은 두려움과 잔인함입니다.


지하 2층에는 배고픈 귀신들이 삽니다. 인색함에서 생긴 탐욕과 부정적인 행동을 한 결과로 여기에 태어납니다. 그런 행동들은 극단적인 빈곤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배고픈 귀신들은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과 갈증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사막입니다. 그들이 우연히 한 방울의 물이나 한 조각의 빵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환영처럼 사라지거나 고름이나 물같이 무서운 모습으로 변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행한 부정적인 업의 결과이거나 공덕을 쌓지 못한 결과입니다. 지하 3층은 지옥입니다. 여기에 사는 중생들은 무자비한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지옥들은 불덩어리들이고 어떤 것들은 얼음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세계들입니다. 지옥중생들의 마음이 불러일으킨 괴물들은 그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합니다. 고통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끊임없지만, 그 중생들을 지옥에 태어나게 한 업이 소멸되고 나면 지옥중생들은 죽어서 윤회 속의 다른 세계에 환생합니다.


이것은 윤회를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알 수 없는 예전부터 윤회의 덫에 걸려있으며 최상의 천국에서 최하의 지옥을 넘나들며 자유도 없고 자율능력도 없이 의미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신들과 함께 최상층에 머물며, 때로는 인간으로 환생하여 지상 1층에 머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는 지하층들 중의 하나에 머뭅니다.
윤회는 감옥과 비슷하지만, 어쨋든 빠져나갈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모든 현상이 지닌 궁극적인 성질인 공성이라는 문입니다. 정신적 수행을 하면 그 문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문으로 빠져나가면 우리는 그 집이 단지 환상이며, 우리의 불순한 마음이 창조해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윤회는 외부의 감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감옥입니다. 그것은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신적 수행을 열심히 실천한 결과로 아집과 여러 가지 혼란한 생각들을 제거하면 윤회를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해탈을 얻고 나면, 남들에게도 어떻게 혼란을 근절시켜서 그들 자신의 정신적 감옥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해탈의 목적입니다. 남들에게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명상수행과 회향

명상 수행을 하고 난 후 가장 중요한 것은 회향하는 것입니다. 회향은 나에게 올 것을 방향을 돌려서 남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남의 몫도 빼앗아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내 몫을 남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생각입니다. 회향은 명상하는 동안 쌓은 공덕을 헌납해서 중생을 성불시키는 데 자양분으로 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공덕을 회향하지 않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으면, 한 번 분노할 때 그 공덕은 쉽사리 파괴됩니다. 평생 계를 잘 지키며, 열심히 수행한 선사가 죽을 때 화를 낸 과보로 뱀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절에서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공덕은 물방울과 같아서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금방 말라버리지만, 강물에 그 물 한 방울을 부으면 흘러가 바다를 이루어 큰 힘을 갖는다고 합니다. 중생 모두가 공덕의 물방울 하나하나를 강물에 띄운다면, 그것이 모여 공덕의 바다가 되어 온 중생을 성불시킬 힘을 만든다고 해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회향이 없는 수행은 쓸모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명상기간의 마지막에 공헌의 기도를 진지하게 암송하면, 명상하는 동안에 쌓은 공덕을 낭비하지 않고 깨달음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보장합니다.


불교 수행은 우리가 자리에 앉아서 명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교 수행은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명상과 일상생활 사이에 틈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명상을 하려면, 명상시간이 아닐 때 우리의 행동을 순수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주의깊은 마음으로 깨어있고, 양심적이어야 하며, 우리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나쁜 습관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교를 깊이 체험하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명상시간에나 휴식시간에나 수행한 결과입니다. 결과를 보려고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마음은 밭과 같습니다. 준비수행을 하는 것은 과거의 부정적인 행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장애들을 제거해서 밭을 준비하고, 공덕이라는 비료로 그 밭을 비옥하게 하며, 불보살님들 같은 고귀한 분들이 내린 축복이라는 물을 그 밭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숙고와 명상은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회향하는 것과 일상생활에도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추수를 익게 하는 방법들입니다.


이상은 티베트 불교 수행법의 기초이자 중심이 되는 ‘람림(깨달음으로 이끄는 점진적인 수행)’에서 기본적으로 설명되는 내용들입니다. 람림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단지 지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 체험시키기 위해서 저술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명상들을 항상 익숙하게 만들면, 종국에는 수행의 모든 단계들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단계에 이를 때까지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해서 숙고하고 명상하는 일에 싫증을 내서는 안됩니다. 계속해서 명상의 주제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새로운 각도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명상하는 힘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단계적 수행들을 체험하고 싶으면, 매일 명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가지씩 주제를 정해서 명상할 수 있습니다. 첫날에는 정신적인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에 대해 명상하고, 둘째 날에는 귀중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명상하는 식으로, 각 주제에 대해서 한번씩 명상한 후에,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해서 익숙해지면, 할 때마다 그 명상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주 민 황 박사

출처 : 인터넷 불교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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