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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 점령에서 관광으로'

2008년 3월 시작된 티베트인들의 평화시위에 대해 중국 정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티베트로 향하는 교통과 통신이 차단되었고 시위대가 피신한 사원들은 봉쇄되었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티베트에 평화를'이라는 주제로 '티베트평화연대'에서 마련한 릴레이 기고를 싣습니다. 학자, 시민운동가, 국제문제전문가, 문인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의 릴레이 기고로 티베트 사태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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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단장한, 한족이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한 티베트 여행의 중심, 죠캉 사원과 라싸의 구시가지
ⓒ 이매진피스 조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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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4일, 티베트 사태로 굳게 문이 닫혔던 티베트는 6월 25일 올림픽 특수를 앞두고 다시 길을 열었다. 티베트 여성과 결혼해 티베트에서 자리를 잡은 한 조선족 가이드는 그의 안부를 묻는 메일에 이렇게 답했다.

 

"학살보다 무서운 건 관광이 막힌 거죠. 라싸 사람들은 70%가 관광으로 먹고사는데 관광객이 막혀 있으니 어떻게 살겠어요."

 

그 모든 신원에 답하듯, 거리의 핏자국을 말끔히 씻어내고 모든 주요 관광지와 티베트 사람들을 정비한 후 중국은 다시 관광을 허가했다. 이미 200명이 죽었고 다시 소요를 일으킬만한 사람들 4천여 명을, 사망률 75%에 달한다는 라싸의 감옥에 잡아가둔 후였다.

 

관광과 점령, 두 겹의 그늘에 선 라싸의 시린 삶

 

2007년 6월, 러시아에서 북경, 남양을 거쳐 티베트에 다다른 여행자, 제천간디학교 친구들은 하루 종일 발길이 닿는 대로 라싸를 돌아다니며 자기만의 시선으로 발견한 라싸의 풍경들을 하나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라싸가 산 위에 있는 도시인 줄 알았는데 빌딩에 차들도 너무 많아 좀 실망했어요."

"시내에 나이키 매장, 소니 매장도 있는 거예요. 진짜 놀랐어요."

"중국인 타운의 슈퍼에 갔는데 한국의 대형마트 뺨쳐요. 손님은 대부분 중국이나 외국인들이었어요."

"맞아요. 상점 주인은 대부분 중국사람인데 종업원들은 거의 티베트 사람들 같았어요."

"후미진 골목 속에 있는 재래시장에 갔더니,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다 티베트 사람들이어서 재밌었어요."

"하루 종일 죠캉 사원 앞에 있었는데,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어요."

 

단 하루, 티베트의 관광지가 아니라 티베트의 삶을, 그것이 음악이든 종교이든, 시장이든 생활이든…. '관광'의 시선이 아닌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로 하고 헤어져 보낸 짧은 시간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죠캉 앞에 하루 종일을 앉아 오체투지 하는 순례자들을 바라보다가, 오체투지를 함께 했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들은 한족타운과 티베트 사람들의 구시가지를 오가며 라싸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라마승을 만나 어렵게 두 번의 통역을 거쳐 라마승의 삶에 대해 귀 기울여 보기도 했다. 저마다 물음을, 시선을 가지고 거리로 나가자, 관광지 라싸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라싸는 다른 시선과 물음을 들고 거리로 나선 아이들이 어떤 진실의 조각들을 보여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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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람들의 재래시장
ⓒ 이매진피스 조완철
icon_tag.gif 티베트

 

'한족은 가게를 하고 장족은 좌판을 한다'

 

한족의 이주가 시작되며 바뀌어 가던 라싸의 풍경을 담은 한 마디였다. 실제로 1993년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라싸에는 1만2827개의 식당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 티베트인의 소유는 단 300개뿐이었다. 시가체에선 192개의 가게 중 3개만이 티베트인이 소유하고 있었고, 캄이나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기록이었다.

 

이미 1992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의 이주 제한을 해제함과 아울러 중국 내에서의 임금보다 2~3배 높은 일자리까지 제공하며 한족의 이주를 지원하고 있던 터였다.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세금 감면과 더불어 파격적인 저리 이자의 대출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런 호혜 속에서 한족들은 쉽게 라싸의 요지에 건물과 땅을 획득했고, 티베트의 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집과 들을 빼앗기고 있었다.

 

발전하는 라싸, 팍팍해진 티베트 살림살이

 

티베트에서 관광업을 한 지 5년 정도 되었다는 한 가이드는 왜 라싸의 관광업 대부분을 한족이 소유하고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칭창 철도 개통 이후 최대 관광객은 대부분 북경이나 성도·서안 등의 중국 여행사와 연결된 패키지 관광객들이죠. 당연히 티베트에 있는 중국인 여행사와 연결되는거구요. 거의 모든 여행사들이 차량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니 우선순위를 중국 여행자들이나 본토의 여행사에서 연결된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두게 되죠. 티베트 사람들은 영어도 중국어도 잘 안될 뿐더러, 차도 없으니 밀릴 수밖에 없죠. 물론 자금력도 큰 문제구요."

 

실제로 칭창 철도 개통 이전 120만이었던 티베트 관광객은 2006년 말 180만 명, 2007년엔 400만을 기록했다. 2007년 티베트의 관광수입만 6억6천만 달러에 달했다. 티베트의 관광이 발달하며 티베트로 오는 관문 도시 중 하나인 꺼얼무는 해마다 GDP가 30%씩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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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개통된 칭짱철도의 라싸 역사
ⓒ 이매진피스 조완철
icon_tag.gif 티베트

 

눈이 부시도록 빠른 속도로 개발과 발전이 밀려드는 라싸, 그러나 그 라싸의 오랜 주인인 티베트 사람들이 설 땅은 너무 좁고 가파른 것이었다. 티베트에서 관광업을 하며 살아가는 한 한국인의 말을 빌리면 "1997년, 300만원 정도였던 건물의 값이 지금은 100배가 올라 3억을 호가하고, 칭창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만도 2~3배가 올랐다"고 했다.

 

라싸 시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온 중국풍의 화려한 티베트 전통의상 가게들 맞은 편, 티베트 옷 가게에서 만난 쏘남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라싸에서 집을 살 수도 가게를 차릴 수도 없어요. 라싸의 모든 것들이 티베트 사람들에겐 너무 비싸요."

 

그렇다고 돌아갈 유목의 땅과 삶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광활한 목초지는 개발을 위해 강제수용 당했고 농지는 한족을 위한 주거지 등으로 용도 변경을 당했다. 물론 그렇게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티베트인들에게는 중국 정부의 '유목민의 정주를 위한 지원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들판을 버리고 정주할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 말해주지 않은 듯했다.

 

추운 들판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유목의 삶 보다는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호텔의 청소부가 되는 편이 삶도 편안했고 현금을 얻기도 쉬웠다. 티베트의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한족들이 운영하는 호텔의 객실청소부로, 인력거꾼으로, 식당의 접시닦이로, 웨이터로, 기념품 판매원으로 하나 둘, 그들의 들과 산을 떠나 이주하기 시작했다. 인구 19만명의 라싸에 몰려드는 400만명의 관광객들을 위해 누군가는 일년 내내 방을 청소해야 했고, 인력거를 끌어야 했고, 접시를 닦아야 했으므로….

 

중국의 관광자원이 된 오체투지, 순례자.... 그리고 티베트 불교

 

그럼에도 라싸는 여전히 도처에서 마주하는 티베트의 전통과 티베트 사람들로 그득했다. 티베트 전통옥을 입고 마니차를 돌리며 포탈라의 바코르를 도는 수백 수천의 티베트 사람들, 몇 달에 거쳐 그 더디고 느린 오체투지의 걸음으로 끝내 죠캉에 이르는 순례자들.

 

죠캉 앞에 설 때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누구나 묻게 되곤 했다. 라싸의 거리에 나서면 어디서든 선뜩 주황 가사를 입은 티베트의 승려들을 만날 수 있었고, 라싸에 살아가는 티베트 사람들은 어디든 조금만 높은 곳이면 기도깃발·타르쵸를 걸어두고 있었다.

 

티베트 자유화 정책 이후 중국이 허용한 종교적 관용 속에서 티베트 사람들은 그렇게 야크버터를 가지고 사원을 오르는 것으로, 오직 믿음의 힘으로 저 고단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여행자들이 카메라에 담아오는 티베트의 풍경 속에서는.

 

그러나 이미 이십년 전, 티베트를 방문한 영국의 외과의사 로버트 로프 교수는 그 티베트의 모습마저도 중국이 "티베트 불교를 외화벌이용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허락한 풍경들일 뿐임을 갈파했다.

 

그는 "중국은 단지 기도 깃발(타르쵸) 세우기, 향 태우기, 오체투지하며 이동하기를 통해 종교적 열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묵인할 뿐 지정한 종교수행, 승려들의 가르침에는 철저한 제한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든 사원을 순례할 수는 있으나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5년형을 살아야 하는 종교의 자유, 그것이 중국이 허용하고 있는 티베트의 불교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관광객을 위해 베풀어둔 거리의 종교적 자유 너머, 저 높은 사원의 담 안쪽에서는 다른 삶이 강제되고 있다는 기록과 증언들이 터져 나왔다. 체제에 동의하지 않은 승려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들, 비구니 승려에 대한 잔혹한 강간은 그 증언과 사례를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1950년 티베트 점령 당시 60만에 이르던 승려 중 11만이 고문으로 사망했고 25만명이 승직을 박탈당하고 구금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다.

 

분쟁지역전문가 하영식은 티베트 정치범 출신의 다람살라 난민들을 인터뷰하며 "티베트의 중국 교도소에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 가운데 70%가량이 승려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저항의 핵심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중국의 종교탄압 정책이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그는 분석하고 있다.

 

감옥에서 죽어나온 승려들의 온몸의 뼈는 부러져 있기 일쑤였고, 어떤 강제노동 수용소의 사망률은 95%까지 치닫기도 했다. 구 캄 지방의 벤첸 사원에서는 3천명의 승려 중 단 8명만이 살아남은 믿을 수없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혹독한 시절을 지나 살아남은 승려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국훈련을 받아야 하고 때로 애국시험마저 치러야 했다.

 

그 '훈련'이란 달라이 라마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사진을 짓밟고 더 나아가 중국의 점령을 찬양하는 일이다. 그것으도 모자라 그 안에 어떤 저항의 움직임이 불거져 나올지 몰라 사원에는 승려의 복장을 한 사복공안이 뒤섞여 있다. 그 모든 억압의 죽음과 폭력의 풍경들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우리가 그토록 소원해 마지않는 순례자의 땅, 라싸의 풍경이었다.

 

티베트 여행,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차가운 점령과 관광의 함수에 눈을 뜬 어떤 이들은 일찍이 티베트 여행을 중단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국의 점령의 적법성을 인정해 주는 행위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여행에서 쓰는 경비의 90%는 모든 (입경허가서·칭짱철도·항공료·입장료) 중국정부의 호주머니에 고스란히 들어가며, 그 돈은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한족 이주 정책을 공고히 하자는 데 쓰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베트의 다른 한켠, 망명정부의 수장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의 사람들은 도리어 지금보다 더 많은 여행자들이 티베트를 향해 여행해야 한다고, 되려 길을 독려하기도 했다. 지금 여행자들이 티베트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티베트의 점령을 목도할 것이며, 누가 그들의 고통과 신음에 귀 기울일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기록하고 진실을 보전할 것이냐는 목격과 증언의 요청이었다.

 

티베트를 여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다시 티베트를 향한 모든 길은 열리고 관광의 물결이 거세어지는 가을,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 할 보다 근원적 고민은 티베트에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여행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시선으로 티베트를 구경하는 관광객이 될 것인가 혹은 점령의 차고 시린 그늘에 서서 티베트의 눈으로 티베트를 바라보는 여행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참고한 자료 :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폴인그램 저, 홍성녕 옮김, 알마), 2008년 8월 8일 자 <한겨레 21>, www.tibet.org www.freetibet.org]

 

[포탈라 궁] 세계문화유산 Vs. 중국의 점령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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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궁
ⓒ 이매진피스 조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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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에 절을 하는 모든 순례자는 오성홍기에도 동시에 절을 해야 한다. 라싸의 상징 포탈라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여행자들은 오성홍기 또한 함께 담아야 한다. 포탈라는 티베트의 것이었으나, 이제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이므로.

 

중국의 주장처럼, 한 해 400만명이 몰려드는 세계의 관광지 라싸의 발전은 티베트가 아니라 중국이 일구어 낸 개발의 업적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티베트의 문화를 보전하려는 중국의 노력으로 라싸의 포탈라궁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았던가. 포탈라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그것은 중국에게, 또 티베트 사람들에게 단순한 문화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었다.

 

중국 정부는 흔들리는 기둥으로 보존을 위해 하루 500명으로 제한되었던 포탈라 입장객 2006년 관광객 급증과 함께 1000여명으로 늘어났고, 2007년 급기야 하루 1600명까지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성수기엔 암표가 횡행했고,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긴 줄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우리 돈 8천원 정도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포탈라궁 관람은 실상 반쪽자리 관광일 뿐이었다. 중국은 1959년 달라이 라마의 망명 직전까지 정치적 공간으로 쓰였던 백궁은 폐쇄한 채 종교적 공간인 홍궁만을 개방하고 있었다. 보전을 위해 하루 입장객을 제한할 뿐 아니라 중국의 인민군이 삼엄한 경비를 서며 지키는 포탈라궁. 티베트의 왕궁이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포탈라궁은 그 앞에서 죽어간 모든 죽음들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1959년 포탈라궁 앞에서 벌어진 티베트의 저항시위에서 중국은 1만5천명을 사살했다. 1966년에는 단 17일 동안, 포탈라를 중심으로 한 라싸 지역에서만 8만7천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 숫자마저도 중국의 점령이후 고문과 처형, 수감 등으로 학살한 120만명의 티베트 사람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포탈라궁은 점령이 시작된 후 20년동안 사라져간 6천여개의 사원들 중 살아남은 단 8개의 사원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떤 가이드북도 안내해 주지 않고 있었다. 하물며 티베트의 관광시장을 장악한 중국 여행사와 가이드에게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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