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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 2009년 6월 11일 개봉

Himalaya, where the wind dwells 

 

최민식, 치링키펄 주연

한국영화의 변화를 주도하는 전수일감독

2009년 6월 11일 개봉

 

 여기에서 나는 희망을 만난다.

 

히말라야의 대자연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찾아가는 '최'라는 사람과 

상처받고 외로운, 부유하는 영혼의 쓸쓸함에 연기경험이 전무한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춘 영화다. 

 

 

보이진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를 카메라에 담아 네팔의 히말라야를 무대로

쳐지는 영화다

 

히말라야 로케이션 - 눈으로 만든 집 - 히말라야 산맥의 거대한 설원, 락샤가 달려가는 카트만두 시내의 풍경, 히말라야 고원에 위치한 고즈넉한 산간마을, 자르코르 등,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이국적인 풍광은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 그 자체만의 밫나는 여행길로 관객들을 이끈다.

 

특히 유명 음악 감독인 김형석 특유의 울림이 있는 음악을 통해 히말라야의 풍광의 특이함을 잘

그려냄으로써  그 분의 음악과 함께 더욱 서정적으로 만든 영화이다.

 


최민식이 돌아왔다. 2005년 <주먹이 운다> 이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가 어디서 이름을 잃어버렸는지 그냥 ‘최’로 돌아왔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대기발령을 받은 최는 공장을 운영하는 동생을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최는 외국인 노동자 도르지가 단속원들을 피해 도망치다 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실직의 위로를 받을 가족조차 없는 최. 그는 유골을 들고 네팔의 작은 마을에 있는 도르지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만만치 않다. 히말라야 산줄기를 오르며 고산병에 고통스러워하고, 도르지의 안부를 묻는 가족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이 작품은 심심하다. 화려한 영상이나 웅장한 음악, 관객들을 웃고 울게 할 유머러스한 대사나 경구는 없다. 영화가 시작되고 15분이 돼서야 단순한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이 등장하고, 40분이 돼서야 도르지의 가족을 만나 본격적인(?) 대사가 나온다. 그 사이는? 오로지 최의 뒷모습이 나온다. 짐을 싸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는 최, 비틀대며 고산지대를 오르는 최, 결국 나귀에 실려 구역질을 하는 최의 뒷모습이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전부라 할 수 있다.

후반부로 가면서 드라마틱한 극 전개나 상황을 뒤엎는 엄청난 깨달음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먼 바다에서부터 시작한 바람이 무심하게 ‘나’를 스쳐 저 산 너머로 지나가는 것처럼 작품은 전개된다. 데이트를 하거나, 한 번 웃기를 바라거나, 뭔가 볼거리를 찾는 관객이라면 보지 않는 게 상책인 작품이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다. 여기까지가 이 작품을 볼 생각이 전혀 없거나 2% 미만인 관객들을 위한 리뷰다. 이제 작품의 진짜 매력을 리뷰한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최와 (작품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도르지는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인물들이다. 기러기 아빠의 실직, 늘 도망쳐야하는 운명의 이주노동자. 삶에 지친 이들의 기묘한 동행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살고 있는가?’ 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동료들은 같이 타려고 하지 않는다. 같이 타면 최의 저주가 전염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건물 속에 갇힌 그들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심심하지 않다. 최의 여정과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차곡차곡 존재의 고민과 슬픔을 쌓아간다. 바쁘기만 한 한국사회와 시계추의 진동이 전혀 중요치 않은 네팔의 마을에서 오는 극적 대비는 시각적, 공간적인 충격을 준다. 도르지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최의 고민은 커져간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멀리 타향으로 떠나 한 줌 재로 돌아온 가장의 죽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느리게 진행하는 듯 하지만 작품은 그렇게 태풍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최가 오열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전수일 감독은 평상시와 같은 흐름으로 덤덤하게 인물의 뒷모습을 포착하고 있으나, 최에게서 뻗쳐 나오는 슬픔은 크다. 어둠이 낮게 깔릴 무렵 돌담길을 걷던 최는 돌무더기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열.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그는 왜 우는 것일까. 실직한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 아내의 싸늘한 반응에 실망해서? 도르지의 죽음이 서글퍼서? 아니면 가족들에게 죽음을 전할 길이 막막해서?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없다. 아니, 여기서 답을 찾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처절하게 무너져버린 한 중년의 사내를 마주하고 있는 ‘당신’(관객)의 느낌이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답이나 변화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작품은 섣불리 답,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고통과 좌절, ‘희망 없음’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것일 터인데, 애써 답을 내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는 흰 말을 쫓는 최의 행위로 나타난다. 낯선 길에서 최는 흰 말을 쫓는다. 흰 말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지 최는 알지 못한다. 그저 따라갈 뿐이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작품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긴 여정 후 홍역을 앓듯 누워버린 최의 모습만 있다.

답과 변화는 없지만 고통의 끝에서 만난 흐릿한 희망의 빛은 있다. 바로 사람의 손길이다. 최가 심한 고통 속에 빠져 누워있을 때 도르지의 아내는 최를 안고 등을 보듬으며 병이 낫기를 기원한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따뜻한 손길로 낯선 이의 몸뚱이를 보듬은 적이 언제던가. 체온과 체온이 만나는 지극히 자연스런 행위조차 우리는 잃고 살고 있다. 하지만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는 아직도 체온의 나눔이 남아있다. 지지리도 못사는 그네들의 삶 속에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는 일종의 고행과도 같은 작품이다. 체험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고행처럼, 작품도 체험하지 않으면 지루함 말고는 남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전수일 감독은 많은 것을 비워둠으로써 관객 스스로 최와 동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관객은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알고 있다. 800km를 걷기만 하는 그 길. 유쾌하기는커녕 고되기만 한 여정, 하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나와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숭고한 가능성. 이것이 작품이 갖고 있는 힘이다. 올 여름 인도나 네팔, 스페인 북부의 순례자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최민식의 연기에 대해 한 마디 한다. 이 작품 속에 최민식은 없다. 그저 최만 있을 뿐이다. 한국 도시에 있든, 네팔 시내에 있든, 히말라야 마을에 있든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던 사람’이다. 이게 바로 ‘최민식’이다. 네팔 시내에서 비를 피해 조금씩 처마 밑으로 들어가는 그의 몸짓과 마지막에 히말라야 마을을 떠나면서 도르지의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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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로니에 2009.08.05 05:19

     

    우리들이 접하지 못 한 내면의 세계 . . .

    우리들이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영상 . . .

     

    참으로 깊고 그윽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이 보면 무언가 동질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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