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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떠날 때 입니다.  
                        
                      故수자타 영전에.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 나는 낡고 고단했던 나의 배낭을 벗으려 합니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
언제나 내 어깨를 짓누르며 육신을 옭아매었던 배낭을 말입니다.
쉬지 않고 바쁘게 걸어 온 이곳이
내가 다다르고자 했던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아무도 나를 위해 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비탄에 젖은 울음은 오히려 진실이 아니며,
떠날 때를 알고 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삶의 배낭을 훌훌 벗음으로써
나는 최초로 자유롭고 처음으로 평온해 졌습니다.
그런데 왜 울고 있습니까?
이제 진실을 알았다면 울음을 그쳐 주십시오.
당신이 울면 나도 따라 함께 울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질곡과 회한,
그리고 애증과 안타까움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생전에 펑펑 솟았던 눈물샘과 함께
그런 감정을 느낄 육신이 이제 더 이상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나의 누더기 같은 육신이
한줄기 연기로 바뀌는 것에 동의해 주셔야 합니다.
욕심뿐인 집착, 잡스러운 노트와 가슴 아픈 기억과
부끄러운 치기, 허망했던 욕심, 허울과 탐욕, 절망만 가득했던
손때 묻은 배낭과 모든 것을 함께 태워
푸른 연기로 바꿔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또한, 그것으로부터 소멸되는 눈앞의 현상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짧지 않은 삶에 기쁨과 긍겨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산다는 것에, 즐거운 세월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런 희망과 함께 절망도 늘 함께 따라 다닌 것을, 나는 이제 압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속박이었음을 이제 압니다.
육신이 살아 숨 쉬는 동안,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미망이었다는 것을,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는데
왜 당신이 울어야 합니까.

눈물을 거두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부탁을 기억해 주십시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몸뚱이지만
어둔 땅속에서 자유를 속박 당한다면
여태 힘겨운 삶의 무게를 지탱해 온 육신이 불쌍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배낭 한 가득 꽉 차 있던 내 삶의 무게에서 해방되었듯
육신도 자유로운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려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리하여 나는, 한줄기 미풍에도 흔들리며
점점 형체가 옅어지다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잊혀 짐이고자 합니다.
다만 갈참나무 여린 잎새를 흔들거나
잔잔한 연못에 비늘 같은 물결 만드는 바람에서
나의 솜털처럼 가벼워진 영혼을 기억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야 진실로 나는 세상의 모든 인연과
굴레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느낌입니다.
그것에 이르는 오롯한 길을 우리는 '죽음' 이라고 부릅니다.
그 죽음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면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면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 드렸다는 걸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 눈물을 멈추고 내게 꿈꿀 수 없는
깊고 투명한 잠을 들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잠들고, 다시는 꿈을 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흔적 지우기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날
맑은 영혼이 되어 푸른 하늘로 오게 될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육신이 불살라지고 한 줄기 연기가 되면
하늘거리며 솟아오르는 나의 마지막 손짓이 그 약속이 될 것이지요.
하늘가에 번져 가다가 이윽고 그 흔적마저 지워져 버리는 사이
태양은 늘 그렇듯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 배낭을 벗을 때입니다.
이렇게 먼저, 짐을 벗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물뿐인 나의 배낭을...

  이 시를 낭송한 것은 7월 4일 춘천 시립화장장에서였다.

  인연은 참으로 막중하다.
  에베레스트를 다녀 온 회원들이 먹은 김치는 카트만두 '소풍’이라는 식당 제품이다.
  우리 산악회, 아일랜드 피크 원정대원들은 기억 할 것이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여장을 풀었던 김홍성 시인의 집과, 그의 아내 수자타를.  
  그들은 십여년 네팔 '소풍'생활을 접고 귀국했고, 그때서야 수자타의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형 부탁이 하나 있어.”
  망연히 서 있는 내 곁으로 다가선 시인이 붉게 충형 된 눈으로 말을 꺼낸다.
  “...?”
  “형 책 에델바이스 마지막 장에 있는 시를, 추모 시로 수자타에게 들려주면 안 돼?”
  “못 해. 그리고 그 긴 장시를 어떻게 외울까.”
  “어떻게든 기억해 봐. 형이 읽어줘. 이렇게 수자타를 그냥 보내기 너무 서운하잖아.”

  나는 휴대폰으로 춘천시내 전화 번호 안내를 부탁했고 서점을 소개 받아 전화를 걸었다.
  다행이 그곳에 책 재고가 있었다. 후배가 차를 타고 그 서점으로 가서 책을 가져왔다.

  하얀 연기가 하늘거리며 오르는, 굴뚝 넘어 보이는 산은 환장하게 푸르렀고 나는 잔뜩 술에 취해 있었다. 정말 이러려고 이 시를 쓴 건 아니었다.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던 이 시가 이렇게 쓰여 질줄 내가 진즉 알았던가?

  우지마라고, 그건 살아 남은자의 회한뿐이라고 나는, 시에서 망자亡者가 되어 주장했다. 술 취한 목소리로 조시를 읽어 내리는 순간, 그럼에도 여기저기서 터졌던 호곡이 전이되어서 일까. 걷잡을 수없는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므로 시는 가짜다.
  사바세계에서 부음訃音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나는 너무 억울했다.  
  그날... 나는 정말 너무 억울해서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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