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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속 텐트에서 열흘째다 한 중년산악인이 물었다
"솔직히 고산 등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답변했다 "정말 쓸데없습니다"

히말라야 산속의 텐트에서 열흘째 지내고 있는 중이다. '여성 세계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하는 산악인 오은선씨를 취재하러 오면서, 난 '사회적으로' 약간 바보가 됐다.

눈 뜨면 일상이 됐던 정치 가십, 사회적 소음,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 날마다 절로 생산되고 소멸되는 '주요 뉴스'에서 너무 멀어졌다. 하루만 부재해도 화제를 못 따라가는 우리 사회에서 말이다.

더욱 문제는 고립된 산속에서는 오늘의 뉴스는 잊혀지고 쓸데없는 것만 점점 화제가 된다는 점이다. 눈 위에 텐트를 치고 몸속의 체온을 뽑아 몸 밖의 한기(寒氣)를 덥히던 어느 날도 그랬다. 다른 원정대 소속의 중년 산악인이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객관적 입장에서 산악인들의 고산등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별빛 대신 불빛(전등)이 밤을 낮으로 연장시키는 도시(都市)에 있었다면 지금쯤 내가 하고 있을 일들을 떠올렸다. 정녕 이런 문답으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답변했다. "정말 쓸데없는 행위입니다."

몇백 미터 몇천 미터 더 높이, 더 험한 루트로 올라가는 데 존재 의미를 거는 일부 산악인들이 어쩌면 들고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난 한 술 더 떴다. "쓸데없는 행위를 하는데도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밥'은 허용하고 있지요."

건강을 위한 등산 취미는 대부분 찬성한다. 통계로는 등산인구가 1000만명이다. 하지만 세상 이치에 빠른 사람들은 고산등반의 어리석음을 금방 안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헐떡거리고, 음식물을 토하고,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소증으로 끙끙 드러눕는다. 관리를 받아도 시원찮을 얼굴은 금세 시커멓게 타고 피부 허물까지 얼룩덜룩 벗겨진다. 동상(凍傷)에 걸리지 않아 손·발가락을 자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 강요받았다면 서로 다투어 "왜 나인가" 반발했을 게 틀림없다. 산(山)의 입장에서 봐도 이런 산악인들은 요령부득한 존재다. 이들이 '영웅'처럼 죽음에 초연할 것으로 세간에는 평판이 나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들이 좀 심심해 장난이나 칠 겸 해서 그 머리에 이고 있던 수백만t의 눈들을 흔들면, 아무리 당당한 산악인들조차 벌벌 떨며 줄행랑친다. 그러다가 또 올라오려고 덤빈다.

이들이 정상을 밟을 때는 산이 잠깐 한눈파는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는 결코 머물지 못한다. 올라서는 순간 내려갈 생각을 하고, 삶을 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정상에 올라섰다고 해서 산이 '정복'된 적이 없고, 산은 늘 그렇게 똑같이 있다. 정상에 선 산악인의 '산 아래' 인생도 바뀌는 게 아니다. 등반으로 얻는 물질적 보상은 별로 없다. '매스컴 스타' 산악인 몇명을 빼면 대부분의 산악인들에게는 밥벌이와 무관하다. 혼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게 전부다.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올라가는 것에 대한 '손익 계산'은 금방 나온다.

그럼에도 일부 산악인들은 이런 '무상(無償)'의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히말라야 산속에서만 벌어지는 장면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주변에서도 '돈도 밥도 안 되는' 쓸데없는 행위에 불합리한 열정을 보이는 인간들을 종종 만날지 모른다.

세상에는 먹고사는 행위보다 더 숭고한 것이 없다. 자식을 기르고 가정을 지키는 데 우리는 언제라도 앞장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생산과 건설, 실용, 효율, 경쟁, 규격, 일방적인 전진(前進)들이 사회의 건강한 '주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필요한 것만 존재할 권리가 있는 걸까. '사회의 비주류'이고 '인생의 주류'였을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인생의 길을 간다. 그는 자신이 밟고 가는 발바닥 크기만큼의 땅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주위의 나머지 불필요한 땅들은 모두 잘라 없애버린다. 그가 걷는 길 바깥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가 됐다. 아, 얼마나 위태롭고 삭막한가." 소위 '쓸데없는 것도 쓸데가 있다'는 강변이다.

가끔은 돈과 밥으로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 행위, 터무니없이 비생산적인 행위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들고, 그 사회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고양해준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게 하고,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의미들을 회복시켜 줄 때도 있다. 성숙한 사회란 어쩌면 이런 '쓸데없는' 행위의 인간들을 포용하고 존중하고 많이 기르고 하는 것을 뜻할지 모른다.

좁쌀만 한 우박이 싸락눈이 되고 마침내 진한 습설(濕雪)로 퍼붓는 히말라야 산속의 텐트에서 생각에 잠긴다. 이 나이까지 내가 해온 일은 과연 쓸데가 있었던 것일까.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 선임기자)  에서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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