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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인 신영철은 1985년 히말추리북봉 세계 초등을
                                                  시작으로 에베레스트, K2등 히말라야 등반만
                                                  18번이나 한 산사나이입니다
                                                  월간 사람과 山기자를 거치며 지구의 높은 산을
                                                  무수히 편력한경험을 기초로 '히말라야 이야기'라는
                                                  저서를 출간하였습니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재미 한인 산악회 회원으로
                                                  2000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 소설부문에
                                                  '환상방황의 그늘'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람과山 편집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산과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진지하나 무겁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풀 잎에 부는 바람과 같이 조르바적 자유로운
                                                  '환상방황'이 옳다고 아직 고집을 피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길을 만드네


음해를 선문답 같이 생활화하는 우리 도반들 답게 이 인간이 미국에 왔다는 것을 내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뜨는 소식을 통해 나도 새삼 알았다.  

살가운 내 땅을 헤매며 엄청 웃고 때로는 눈물 한 방울 찔끔거리고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든 참 바쁘게 보낸 시간이었다.

언제 미국 땅에 왔느냐고 묻지 않기를.
그리고 언제 한국 땅에 올 것인가를 묻지 말기를.
두 다리 달렸다고 바쁘게 돌아 다녀야 하는 천형의 역마살이 인생이 어디 있는 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구름에 달 가듯 길 떠나 휘적휘적 걷다 다리가 아플 즈음 만나는 동네의 잘 익은 막걸리 한잔에 세상 즐거워하는 홀로 아리랑이 무시되면 또 그게 무슨 대술까.
  
휘적휘적 여여롭게 걷는 것과 바쁘게 걷는 것의 분별은 믿을 수 없는 마음뿐이로구나. 마음에 대한 경구에 이런 말이 있었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넉넉할 때는 바다 같다가도, 좁아 질 때는 바늘 하나 꼽을 곳도 없는 마음이여!"

허산, 두문당은 이렇게 그의 시에서 이  선천적 나그네... 어울리는 시어를 끄집어냈다
'마음이 길을 만드네... 달빛 아니라도 환 한길...'.
천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경주 남산 보름밤 숨죽인 산행에서 죽비로 얻어맞듯, 한 생각이 그런 시어를 조합해 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때도 우리는 느리게 걸었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정말이지 느리게 사는 건 어떨까.
따지고 보면 느림이 주는 안온함은 바쁨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닐까.

느림에 대하여 한 생각 몰입 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낙서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이제 바쁠 건 없다.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다향 짙은 녹차를 다리자. 그리하여 시간의 여백이 주는, 조금은 따분한 시간을 죽이자. 바쁘게 길 떠난 나를 기다린, 먼지 앉은 다관 씻어 우려내고 있는 오룡차 향기가 시나브로 피어오르는 여백을 즐기자.
오랫만에 훠이훠이 살가운 땅을 걸었던 나그네길에서 다시 돌아와 앉은 내 책상이 사뭇 정겹다.

산다는 게 별건가. 이렇게 느긋한 심사로 가끔 차를 우려내며 맞바람 속에 걸었던 지난 일들을 반추해 내는 재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세상이 신난다는 월드컵으로 또는 무서운  테러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현실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것 없더라도 솔직히 산다는 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그런데 세상사 험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이 즐겁다고 느끼기엔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가, 그대는?.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절절하고 고마운 기억이 있다면 그대 생각을 바꿔 봄직도 하다. .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신기루 같은 그늘에서 붕어빵 닮은 문명인 노릇에 회의를 한번쯤 가져 볼일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신기루 또는 그림자 같이 허상이 주는 상상은 늘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각성을 하게 했다. 참 허망한 일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 혹은 죽는다는 것에 대한 극명한 대비를 겪고 나면 한가지를 알게 된다.
춥고 척박한 동토의 땅 히말라야 속살 보러 떠났던 작년 나그네의 방랑길이 기억으로 남은  지금 그걸 나는 몸으로 절절하게 느낀다.

정말 느림도 미학이다.
칼 붓세의 싯귀대로 산 넘어 행복이 있다는 허상을 좇아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열심히 걷는 길은 끝이 없는 길이다. 다행이 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는 길을 갈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끝이 있어야 할 히말라야 산을 찾았고, 떠났고, 올랐다.
그곳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갔다. 목에 주먹만한 쇠방울을 달고 우리 짐을 히말라야 산록까지 옮겨 주었던 고산소 야크 걸음 닮은 듯 닮아 느리게 갔다. 덩그렁 덩그렁 울리는 야크 목의 방울 소리까지도 야크 걸음 닮아 느렸다.
시간이 더디 가는 건 문명과 상대적 거리를 둔 산 속 생활의 덕목이고 축복이다.

히말라야 산록을 걷는 다는 것은 어질 머리 나는 일이다.
고소증 때문에 어지럽기도 하지만 희박하고 투명한 공기 속에 붙박이 그림처럼 서 있는 하얀 산이 환상처럼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소증을 견디기 위하여 걸음은 자연스레 느릴 수밖에 없겠으나, 기실은 목 빼고 병풍처럼 시야를 에두른 만년설 덮인 장엄한 산을 치올려 보아야 하기 때문에도 걸음은 느리다.

바쁘다는 게 무엇인가.
무엇이 바쁘게 걷고 뛰고 급기야 시공을 초월하게 만드는가.
생각은 공간 이동이 자유롭다. 중력과 시공에서 자유로운 허허로운 마음 좇아 중력에 옥죄인 몸을 따르게 만드는 일은 과연 가능한가. 생각이라는 잡히지 않는 마음 따라 어디까지 바쁘게 걸어야 하는가.

혹, 그 일이 부질없는 일이라면, 그걸 알았다면 이제 그걸 멈추어야 한다.
일생을 걸고도 잡히지 않을 허허로운 마음 따라 뛰는 짓거리를 멈추어야 할 때다. 그걸 안다는 것만으로 남들 뛰는데 걸음 멈추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뛰어 보았자 도달 할 곳에 머물 곳은 없다. 궁극적으로 온 몸 던져 도달 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러므로 다시 뛰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과, 애써 다달은 그 곳은 저 만치 물러가 있다는 것의 때늦은 발견에 다름 아니다.
  
느리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
생각 따라 몸도 느리게 움직이고 마음 따라 느리게 걷는 건 바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나쁜 생각인가. 빨리 걷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는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오만한 생각이 모래성 쌓기라는 걸 그대 아는가. 잠들면 꾸는 꿈처럼 공간 이동의 자유로움은 환상방황이고 결국 몸 따라 한생각도 느린 속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유유자적 어기적 걷고 있는 야크 걸음 닮아 목에 걸린 쇠방울 소리도 진양조이지만 그것도 빠르다는 히말라야는 정지 된 화면이었다. 모든 것이 붙박이처럼 서 있는 자연은 그러므로 바쁜 마음이 없다.

그이고 그런 묵언 속의 산은 생각 많은 인간의 조상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아닌가.

제도적으로 미국인으로 변신 할 수도 없지만 미국인이 된 들 크레마뇽인이 된 들, 월드컵 중계를 맥주컵 기우리며 고래고래 고함 치며 본 들, 시간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젼 중계를 보는 나라만의 축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지만 그것만이 꼭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또, 그 시간이라는 냉정한 것은 그런 소란 때문에 바삐 가던가 느리게 가는게 아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미국에서 엄청 큰 멀티 텔레비젼을 보며 고한을 치다 목이 쉰 내가 행복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텔레비젼 볼 수 없는 히말라야 산록의 셀파가 월드컵 못 보아 불행 한 것이 아니다.    

우린 곧 만나 게 될 것이다.
그때 또다른 기억을 떠올리며 입에 거품을 물겠지만 곧 기억 속에서 사라 질 것을 생각하자.
그리고 손에 든 술을 천천히 ... 느리게... 느리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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