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유게시판

조회 수 15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특파원 현장 리포트▒ 무산소로 K2오른   김창호를 만나다
▒ 글 | 신영철 특파원  사진 | 박재용·부산원정대  


K2 SUMMIT! BUT I CLIMB WITHOUT OXYGEN!Korean Best Climbing of pre-monsoon in HIMALAYA


김창호(38세·서울시립대학교산악부OB)씨는 힘이 세다.

여기서 힘이 세다는 건, 당연히 물리적인 힘을 말한다. 힘이 세야 암벽등반도, 고산 거벽도 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힘이 세다는 건 고산을 꿈꾸는 산악인들에겐 듣기 좋은 칭찬이 될 것이다.
히말라야 같은 고산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힘이 센 사람을 스카루드에서 만났다. 고산 등반의 역사에서 그들의 힘은 성공여부의 관건이었다. 바로 K2 베이스캠프에서 만났던 부산 원정대 셀파들이다. 우리 취재 팀은 김창호씨를 만나고 나서, 오를 때 지겨웠던 발토르 빙하를 피해 곤도고라(5740m) 패스를 넘었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며 지름  길로 스카루드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내려 올 줄 알았던 셀파들이 먼저 와 있었다. 펨바 카일라(34세)셀파와, 파상 세링(32세)셀파였다.
그들은 우리가 일주일 걸려 오른 발토르 빙하를 30시간 만에 내려왔다고 했다. 역시 셀파들은, 등반 능력은 몰라도 힘이 세다. 그 힘으로 그들은 에베레스트를 5번 올랐고  그래서 부산 팀에 픽업되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용사는 없다. 친한 동료이자 같은 마을 출신인 니마누르 셀파의 추락사를 목격한 후 전의를 잃었다. 그들도 오르고 싶었던 K2는 8500미터에서 포기했다.
“김사부(김창호)는 대단했어요. 한국 팀과 등반을 많이 해 봤지만 그런 괴력은 처음 봤습니다. K2 등반 중 한번도 우리를 앞세우지 않았어요. 무산소 인데도 말입니다.”
얼굴이 흑인처럼 까맣게 탄 파상의 말을 들으며 곁에 앉은 카일라 셀파도 동의한다.
“우리가 따라 갈 수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요. 루트를 개척할 때도 늘 50미터 정도는 앞서 나가는 거 같았어요. 배낭에 고정시킬 어망로프를 넣고 한손으로 그걸 풀며 루트를 오르는 걸 보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김창호씨의 체력을 목격하며, 힘 때문에 히말라야 호랑이라고 불렸던 셀파들은 질렸다고 표현 한다. 과연 김창호씨는 힘이 센가? 짐짓 농담을 했다
.“힘이 센 사람들은 대게 머리가 나쁘다던데. 무식하니까 용감한 거 아닙니까?”
“아니요. 김사부 머리는 무척 샤프해요. 등반 루트는 물론 주변의 지형까지 설명해 줬어요. 덕분에 카라코람 산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죽은 친구 니마 셀파의 부인은 이미 두 자녀가 있고 현재 아기를 임신 중이라고 했다. 그녀를 만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김창호씨를, 아니 한국 등반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K2는 네팔과 많이 달라요. 너무 가팔라요. 아마 이쪽 산이 다 그럴 거 같아요. 김사부처럼 베리핫 산악인에게 맞는 산은 네팔이 아니라 이쪽이 아닐까요?”
베리핫을 어떻게 번역 할 수 있을까. 너무 뜨겁다가 맞을지 열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뜨겁고 열정적인 김창호씨를  K2에서 만났는데, 산소를 쓰지 않고 정상에 올라 심장이 과열 된 탓일까. 그 역시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또한 그는 무슬림처럼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안 보이던 콧수염이 많이 길었네요. 기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산소  마스크 착용 할 때 콧털이 있으면 숨  쉬기가 편해요.”
“무 산소로 올랐다더니 산소를 썼나요?”
“아니요. 원래는 등정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쓰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폭풍설에 다 잃어버리고 내 몫은 딱- 한 통이 남은 겁니다. 그래서 대장님께 말씀 드렸지요. 무산소도 가능할 것 같다고요. 대장님이 허락해 주셔서 시도한 겁니다.”


루팔 벽의 영광은 준비 된 것이었다
그가 혜성처럼 산동네에 휘황하게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2005년 파키스탄 낭가파르밧(8126m) 루팔벽 등정 이후였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트랑고 등반과 가셔브룸 4봉 동벽, 그리고 힌두쿠시 산맥과 카라코람을 아우르며 무수한 초등반과 초등정을 이룬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그가 선호한 벽 등반이지만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그리 크게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한국인도 드디어 루팔벽을 올랐다는 낭보와 함께 김창호 이름이 본격적으로 산동네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2006년엔 가셔브룸1.2봉을 최단시간 연등하며 그가 준비된 고산등반가였음을 증명해냈다. 그와 함께 등반한 적이 있는 산악인은 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창호씨는 정말 힘이 좋아요. 카라코람에서 짐을 지는 걸보며 아주 질린 적이 있었습니다. 경비 문제로 대원이 직접 25킬로를 지고 캠프로 올라가는데 따불로 지는 거예요.”
“등반 선을 읽어 내는데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밀어 붙일 때 보면 매저키스트(자학성향)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서워요.”
K2 베이스캠프 체류는 즐거웠다. 저녁이면 오은선 팀도 놀러와 부산 지휘부인 대형 텐트에 모여 앉아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두 성공적인 등반을 끝낸 홀가분한 마음들이었고, 브로드피크 연속 도전을 위한 망중한을 즐기는 때였다. 그런 한담 속에 김창호씨의 다른 면은 아주 돋보였고, 그 이야기를 귀담아 두었다.
“카라코람은 엄밀하게 말해서 히말라야가 아닙니다. 인더스 강으로 단절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낭가파르밧은 히말라야가 맞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산악인들이 그리 많지 않아요.” 라든가, “K2는 알지만 K1이 마셔브룸이라는 걸 아셨어요? 지금 인도와 분쟁중인 시아첸 빙하 넘어 스리나가르에서 측정한 겁니다. 거기선 왼쪽 첫 번째로 마셔브룸이 보이니까요.”
김창호씨는 카라코람 산맥의 역사와 세세한 등반사, 더 나아가 정치적 환경과 까마득한 옛날 존재했다 사라진 소왕국에 이르기까지 이 동네를 꿰고 있었다. 몇 번의 탐사를 통하여 이 지역을 조금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교만이 일순 사라지는 때였다. 나는 공개적으로 김창호씨에게 ‘움직이는 브리테니커 파키스탄 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역시 김창호씨는 힘이 세다. 처음에 말한 힘은, 체력이었지만 지금은 머리에서 나오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문득 누군가 김창호씨의 힘을 말한 게 생각났다.
“일본에서 발행한 힌두쿠시와 카라코람 산군에 대한 두툼한 책 두 권이 있는데 그걸 달달 외워요. 그리고 등반하면서 현장을 한 오년 답사했을 거예요. 그것뿐인가요. 등반 끝나면 라호르 같은 옛 도시를 찾아 고서적이나 도서관을 뒤졌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대로 그것이 물리적인 거보다 센 힘이 아닐까. 학습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일도 그는 병행하고 있다. ‘한국고산거벽등산학교’가 그것이다. 그  등산학교는 김창호씨의 등반 방식과 더불어 이런 노하우를 그대로 배운다. 교육을 시키려니 스펠링 하나도 허투루 외워선 안 되었을 것이다.
“브로드피크 등반 끝내고 귀국하여 추석 보내고 중국 갑니다. 중국, 티벳 히말라야 탐사지요. 운남성-미얀마 국경- 대 히말라야와 니엔칭탕굴라 산맥을 관통하는 단독 탐사입니다. 한 1000킬로미터는 되더라고요. 몇 년 전부터 해 온 작업이고요.”
“그런 기획이 소위 김창호 프로젝트(Kim Chang Ho project)입니까? 그런데 그런 계획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짭니까?”
“빅월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세상은 넓고 산은 많습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카라코룸의 미등봉과 거벽에 초등 및 신 루트 개척하고자 하는 거지요.”
“대단한 기획이군요. 등반 대상지가 갑자기 광역화 되는 기분이 드네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내년엔 어떤 등반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김창호씨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만 하더라도 바투라2봉(7762m) 초등계획, 라톡Ⅰ봉(7145m) 북측 스퍼, 쿠냥츠히시 동봉(7400m) 남벽, 거기에 루팔벽을 오르며 봐 두었던 낭가파르밧 마제노 능선 종주등반 등등….
“거의가 거벽 등반이군요.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계획에 없습니까?”
“올 봄 등반하면서 남벽쪽 신루트를 눈여겨 봐 두었습니다. 구글어스를 통하여 그 남벽의 등반 선을 관심 있게 조사하고 있고요.”
“실례지만 군대는 어디를 갔다 왔나요?”
“해병대입니다. 故 이현조씨는 학사장교였지만 저는 사병이었습니다.”
루팔벽을 오를 때 파트너였던 故 이현조 대원은 올 봄 에베레스트 남벽에서 산화했다. 귀환 길에 우리는 따라싱의 낭가파르밧 루팔벽을 들렸었다.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김창호와 이현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헤를리코퍼 베이스캠프라고 불리는 루팔쪽은 너무 어려워 그들 원정대 이외엔, 아직도 한 팀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푸념을 했다. 그 베이스캠프에서 직각으로 서있는 듯한 루팔 벽을 치올려 바라보며, 그 험상 굿은 벽을 올랐던 이현조를 추모했고 김창호를 떠올렸었다.


K2 무산소 등정은 이번 시즌 최고의 등반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대단한 체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등반 방식은 스스로 맞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고정로프를 깔 때, 한 사람이 확보하고 선등을 하면 힘도 많이 들고 능률이 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위험을 담보하며 속공으로 가는 게 옳은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지요. 배낭에서 고정로프를 꺼내어, 풀며 오르는 방식을 처음 본 셀파들이 놀라던데, 그러면서도 평균 5미터 정도로 자기 확보는 정확하게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셀파에 대하여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묻는 말은 셀파를 고용하는 극지법 등반 방식을 말하는 거였다.
“사실 산소만 쓰지 않는다면 그들이 필요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등반자에 따라 선택의 문제겠지요.”
“선택의 문제라…, 좀 더 구체적 대답이 필요한 거 같네요.”
미묘한 질문이었다. 소위 ‘등로주의’냐, ‘등정주의’냐를 묻는 거였다. 대답이 하도 다양하여 그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백가쟁명의 시대가 지금 아닌가.
“첨예한 등반은 그 나름의 목적이 있지요. 그러나 그 숫자가 전체 클라이머의 5% 정도 밖에 안 될 겁니다. 그 소수가 다수를 비판 할 수는 없다고 봐요. 능력이 안 되는데 그 길로 몰아가면 결국 죽으라는 말이고, 아예 산을 가지 말라는 게 되니까요.”
김창호씨의 말은, 어느 방식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변화 되고 미분화로 분화된 등반 행태에서 어느 것이 표준으로 존재할 수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남의 등반을 쉽게 평가하기에는 등반의 장르가 너무 복잡하다는 말도 된다.
“이번 K2 팀웍은 좋았습니까?”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K2 등반 보고서를 보면 알 겁니다. 제가 읽은 보고서 중 작년 이 팀이 펴낸 에베레스트 보고서보다 훌륭한건 못 봤어요. 이번도 그럴 겁니다. 다른 나라 등반 보고서 3권을 번역해 올 정도로 홍 대장님은 치밀한 성격이지요.”
“부산 팀의 14좌 등정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을 것 같은데 계속 함께 가나요?”
“불러만 준다면 함께 해야죠. 아직 총각이지만 이번 등반은 신혼처럼 즐거웠고 행복했으니까요.”
귀국한 후 보도를 통해 김창호씨의 브로드피크 등정 소식을 알았다. 셀파도 없이 김진태 대원과 함께 버섯구름 속 폭풍을 헤치며 뛰다시피 올랐다는 것을. 이번 시즌 히말라야에 도전한 한국등반대가 네팔과 파키스탄에서 행한 등반 중 김창호의 K2 무산소 등정은 최고의 등반으로 기록 될 것이다.



.................. 이 글은 2007년 K2베이스캠프에서 쓴 글이다. 고인은 이 글이 너무 자신을 잘 표현해 주었다며 카피를 해 지도교수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11년이 흘렀다. 올 여름 만난 김창호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군의 구르자히말 남벽에 신루트를 낼 것이라고 찾아 왔다. 1988년 나는 원정대 대장으로 구르자히말을 갔다 왔다. 그 후로는 한국원정대 도전이 없었기에 자료를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깜짝 놀랐다. 나에게도 없는 문고판으로 펴 낸 구르자히말 원정 보고서를 복간해 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만나 밤새 통음을 한 임일진감독과 함께 구르자히말로 떠났다.


그들은 히말라야로 갔고 나는 미국으로 왔다. 아침을 먹는데 카톡 알림소리가 울렸다. 전화기를 여니 김창호가 구르자히말에서 죽었다는 연락이다. 그 사람 좋은 임일진감독도 함께. 급하게 구글링을 해보니 이미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국산악인 5명 네팔스텝 4명 등 한국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세 번째로 큰 참사가 일어 난 것이다. 밥이 목에 걸려 컥컥 거리다 뱉어 버렸다. 카톡이 바쁘게 울리기 시작했다. 김창호에 대한 추모 글을 써달라는 잡지사의 청탁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49살. 둘 다 마흔 아홉 동갑이었다. 겨울로 가는 계절인 엘에이엔 비가 내리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