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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맛과 가운(家運)
      
                                               김 명 규

    
    업고 있던 손주딸을 마루에 내려놓으며 어머니께서 나직하게 말하셨다.
    "내일은 메주를 쑤어야겠구나."
    해야 할 일을 미루고는 견디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성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김장을 끝낸 지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또 메주를 쑤다니. 피곤이 겹겹으로 덧쌓여 오는 것 같았다.
    
    25년 전, 신혼 시절이었다. 그때는 유난히 겨울도 빨리 닥치고, 동짓달부터 눈이 많이도 내렸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첫딸을 낳고, 돌이 채 지나지 않아서 둘째 아이를 갖게 되어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었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메주콩을 씻고 앉았노라면 부른 배가 자꾸만 뒤로 당겨져 주저앉곤 했다.
    콩을 씻어 놓은 다음엔 장 담글 큰 독을 씻어야 했다. 먼저 독 안에 신문지를 태워서 그 불로 소독을 하였다. 
    깜깜한 독 안에 신문지의 불길이 활짝 피어나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 빛은 황홀하고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불길이 사그라진 뒤 물을 끼얹고, 솔뿌리 솥솔로 벅벅 문지를 때면 엎드린 배가 독에 지그시 눌렸다. 그 때마다 
    뱃속의 아기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길질을 해댔다.
    
    다음날 메주콩을 안친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그 앞에 무거운 배를 부리고 앉아 불을 쬐면 노곤하고 
    아늑하여 졸음이 왔다. 콩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부엌 안에 퍼질 무렵이면 씻어 둔 고구마를 몇 개 콩솥에 
    쑥쑥 박아두었다. 또 한 차례 김이 오르도록 불을 때고 나면 콩맛이 잘 밴 고구마는 노랗게 익었고 한결 
    더 맛이 좋았다.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는 양이 안쓰러웠던지 어머니가,
    "그냥 먹으면 체할라. 이거랑 같이 먹어라."
    하고 김치 사발을 등뒤에서 건네주셨다.
    
    푹 삶은 메주콩을 찧는 일이 내게는 제일 큰 고역이었다. 메주콩은 찧을수록 찰기가 더해져서 절구공이를 
    뽑아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손은 시리고, 겨울인데도 등에선 땀이 흥건히 솟았다. 숨이 차서 
    헐떡거릴 때쯤 시어머니는
    "얘, 이젠 내가 좀 찧으마."
    하시며 절구공이를 빼앗아 끝마무리를 지으셨다. 널찍한 안반에 네모나게 메줏덩이를 뭉쳐서 빚을 때면 
    예쁘게 만들어야 아기도 예쁜 아기를 낳는다며 어머니는 내 서투른 솜씨를 타일러 말씀하셨다.
    
    방 세 칸 짜리 전셋집이라지만, 묵은 살림으로 꽉 찬 비좁은 방이었다. 하루쯤 말린 메주를 통나무에 
    다닥다닥 엇갈리게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 아닌 메주 트리는 겨우내 큰방 한쪽을 차지하고 지냈다.
    공기 맑고 햇볕 좋은 장독대에서 발효된 된장은 정말 맛이 있었다. 봄에는 쑥국, 여름에는 아욱국, 가을이면 
    또 호박잎국…… 사시사철 맛있는 된장국과 김치만 있으면 애들 아빠는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묵은 된장을 항아리에서 퍼낼 때 거뭇한 위엣 것은 제껴 놓고 깊은 곳에서 꺼내야만 샛노랗고 촉촉한 게 
    맛이 좋았다. 어머니는 가끔씩 장독과 항아리들을 열어 보시며 내가 속엣 것만 떠오며 굴을 판 된장도 
    얌전히 다독거려 놓으시곤 하였다.
    
    긴 겨울을 편히 보내고 정월이 되면 어머니는 또 장 담글 준비를 미리 걱정하셨다.
    "나 죽은 담에는 무덤에 와서 장 담아 달라고 할래? 올해는 너도 간장 한 번 담아 보아라."
    그 해 따라 어머니께선 며느리에게 장 담그는 순서를 가르쳐 주셨고, 인제 그 일을 완전히 일임하시려는 것 
    같았다. 노랗게 곰삭은 된장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고도 우리 식구가 일 년은 더 먹을 수 있을 만큼 우리 집은 
    된장이 넉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번거롭고 귀찮은 연례 행사를 해마다 거르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간장이랑 된장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뭣하려고 또……"
    행주로 장독을 닦다 말고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셨다.
    "메주콩 찧기가 힘들지야?"
    어머니는 다 안다는 듯 웃으시며 되물었다. 
    "해마다 새로 담근 장맛으로 그 해의 가운(家運)을 알 수 있단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해마다 남은 간장은 묵은 장과 섞어 몇 년이건 묵혔다. 묵은 간장의 장독을 열어 보면 
    하얗게 박꽃이 곱게 피어 있고, 향그러운 단내가 풍겼다. 간장 위에 핀 흰 박꽃은 장맛이 좋을 때 피려니와 
    길조를 알리는 조짐이라는 것이었다.
    
    
    
    그 해 봄에도 새 된장을 거르고, 어머니는 간장을 끓이셨다. 내내 묵은 장만 먹다가 오늘은 새 간장으로 
    미역국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장독대로 갔다. 새로 담근 장 위에 칙칙한 고래기가 진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장맛을 보니 쓰고, 역한 냄새가 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는 수 없이 묵은 장을 떠다가 
    그날 저녁 미역국을 끓였다. 저녁상을 치운 뒤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새 장맛이 이상하게 변했네요."
    "으응?"
    어머니는 놀라면서, 요즘 장독 뚜껑을 잘 열어 놓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고만 하셨다. 다음날부터 나는 
    열심히 장독 뚜껑을 열어 따뜻한 봄볕을 쬐었지만 새 간장은 더욱 그 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즈음,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와 셋째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다. 
    시장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대문 앞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웃집 아주머니가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애 엄마, 큰일 났어! 할머니가 부엌 바닥에 쓰러져서 애들이 큰소리로 울고 야단이잖아. 우리가 듣고 
    나와 할머니를 안방에 뉘어 드렸으니, 어서 병원으로 모시고 가 봐."
    허겁지겁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 학년인 아들과 삼 학년인 막내딸이 할머니 머리맡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고 의식 불명인 듯 어머니는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나는 급히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남편은 곧바로 조퇴를 하고 달려왔다.
    뇌 혈전증.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시던 중이었다. 막내딸이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즐거워서, 그리고 할머니가 사주시는 과자를 먹는 재미로 할머니와의 병원 동행을 
    좋아했었다. 눈이 어두워지셔서 시내버스의 번호가 잘 안 보이셨던 어머니는 손녀가 버스 번호를 알아보고 
    소리치는 것을 그토록 귀여워하셨다. 세 손자를 씻겨주고 머리를 빗기면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던 어머니. 그 귀여운 손자들도 마다하시고 의식불명이 되신 것이다.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 치료하여 의식은 약간 돌아온 듯했지만 말을 전혀 못하시고 누운 채 겨우 손짓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다. 더 이상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병원 측에서 퇴원을 재촉하였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올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그토록 정갈하시고, 손끝으로 음식 맛을 잘도 내시던 어머니가 방안의 네 벽에 변을 묻혀 놓기 일쑤였다. 
    그 얌전하신 분이 이렇게 변하다니 기가 막혔다. 장병(長病)에 효자(孝子) 없다고 하였던가. 화가 나서 나는 
    어머니께 소리도 지르고 퍼붓고 앉아서 울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기만 하면 당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음식을 요구하셨다. 나는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차마 혼자 밥을 먹기가 괴로워 점심을 거르는 때가 많았다.
    부엌에서 쓰러진 지 여섯 달만에 기어이 어머니는 떠나시고 말았다. 추석이 지난 무렵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안 정리를 하다가 나는 문득 봄에 담근 새 간장 생각이 났다. 장독의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 담근 장맛으로 가운을 알 수 있단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마지막 전설 같은 말씀이셨다. 썩은 된장을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담그신 장독의 간장을 고스란히 하수구로 쏟아 내버리면서 나는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장은 그 집안의 가운과도 같으며 어머니와 동격인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나보다
    정월장을 담궈야 장 맛이 변질될 우려가 없다시며 해마다 이맘때면 샛방에 달아놓은 
    매주를 깨끗하게 씻어 빛살고운 날에 물끼없이 말린다음 큰 너리기에 왕소금 플어 
    하룻밤 재운 뒤 아침 햇살이 퍼지기 전에 매주를 항아리 아래깔고선 조심스리 소금물을
    부워서 숯과 고추 통깨를 언은다음 짚으로 장독 아가리를 잘 두른후 뚜껑을 덮어 우린간장
    황금같이 누우렇게 발효된 된장 맛을 본적이 언제적인가..
    
    개인주택에서 아파트 고층으로 이사를 하면서는 해년 실패...
    원인은 햇볕이 직사광선으로 들지않고 꺽여서 들기에 빛의반사를
    많이 흡수하지 못하기에 그렇다고들 한다..
    
    몇년을 실패하고는 아예 장담이를 포기하고 시골 정월된장집에서 사다 먹었는데
    올해는 친구가 우리콩으로 쑨매주 두 덩이를 주어서 시골 고모네 집에 담궈두었다
    
    올해담은 장이 제대로 쑥성된다면 나에게도 길조가 있을거야
    그렇게 믿고싶은 마음...
     
    * 1948년 전북 정읍 출생 
    * 전남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수료 
    * 1997년7월 에 수필 '장맛과 가운(家運)'으로 신인상 당선 
    * 1998년 제9회 마터나 문학상에 수필 '도끼를 찬 여자'로 동상 
    * 2000년 겨울호에 수필 '그 해 겨울 이야기' 초회 추천 
    * 2001년 봄호에 수필 '마지막 선물'로 추천 완료 
    * 광주여류수필 동인, 광주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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