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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ㅣ재미 한인산악인 김명준씨] 강해도 너~무 강한 '울트라맨!
  • 글·박정원 부장대우 | 사진·김명준씨 제공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마라톤 그랜드슬램·세계 50개 독립봉 중 29개 등정

아시아 최초 7대륙 정상 최고령 등정(2006년 10월), 아시아 두 번째 마라톤 그랜드슬램(2009년 1월), 세계 최초 7대륙 최고봉 등정자가 동시에 마라톤 그랜드슬램 달성, 세계 네 번째 세계 50개 독립봉 중 29개 등정(2013년 10월 현재).

이만 한 기록이면 전문 산악인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7대륙 최고봉과 세계 50개 독립봉 중 29개를 혼자의 힘으로 해냈으니…. 그것도 아마추어 산악인이 말이다. 그 주인공은 재미 한인산악인이 아닌 재미 한인사업가 김명준(70)씨다.



	그린란드 최고봉에서 김명준씨
▲ 그린란드 최고봉에서.
먼저 그가 달성한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자. 2006년 10월 30일 세계기네스협회로부터 7대륙 등정 세계 최고령자로 공인 기록증을 받을 당시 만 63세 258일 때의 기록들이다. 1999년 6월 25일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등정, 1999년 12월 31일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59m) 등정, 2000년 7월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5,642m) 등정, 2002년 6월 28일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등정, 오세아니아 2003년 8월 6일 호주 코지우스코(2,228m) 등정, 2004년 12월 19일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79m) 등정, 2006년 5월 19일 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 2006년 10월 30일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4,884m) 등정.

마라톤 그랜드슬램 기록도 보자. 1999년 3월 북미 LA마라톤 4시간 52분, 2007년 4월 북극 마라톤 6시간 16분 8초, 2007년 10월 유럽 ING암스테르담 마라톤 4시간 8분 2초, 2008년 1월 아시아 홍콩 코스트 마라톤 4시간 35분 36초, 2008년 7월 오세아니아 호주 골드 코스트 에어포트 마라톤 4시간 13분 27초, 2008년 10월 남미 에콰도르 과야길 마라톤 4시간 16분 38초, 2008년 12월 남극 마라톤 6시간 26분 47초, 2009년 1월 아프리카 모로코 마라케 마라톤 4시간 24분 26초.

세계 50개 독립봉(World Top 50, 50 Most Prominent Peaks on Earth)은 29개 등정으로 현재 4위지만 아직 진형행이다. 머지않아 세계 1위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접할지 모를 일이다. 지질학자들은 세계 50개 독립봉을 “군락을 이룬 산봉우리에서는 하나의 봉우리만 해당되며, 거기서부터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와 있는 거의 해발 ‘0’ 상태서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봉우리를 말한다”고 개념을 규정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히말라야에는 에베레스트 봉우리 한 곳밖에 해당 안 된다. 홈페이지 www.peaklist.org 참조.


	세계 7대륙 최고령 등정 기록을 보유한 김명준씨
▲ 세계 7대륙 최고령 등정 기록을 보유한 김명준씨가 자신의 등정기록과 마라톤 기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김명준씨가 2007년 북극 마라톤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출발 직전에 있다.
▲ 김명준씨가 2007년 북극 마라톤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출발 직전에 있다.
이 개념에 따른 세계 50개 독립봉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 에레베스트(2006년 5월 등정), 2위 아콩카과(1999년 12월 등정), 3위 매킨리(2002년 6월 등정), 4위 킬리만자로(1999년 6월 등정), 5위 콜롬비아 크리스토발 콜론(미등정), 6위 캐나다 로간 마운틴(미등정), 7위 멕시코 피코 데 오리자바(2003~2006년까지 4회 등정), 8위 빈슨매시프(2004년 12월 등정), 9위 인도네시아 푼카자야(2006년 10월 등정), 10위 러시아 엘브루스(2000년 7월 등정), 11위 프랑스·이탈리아 몽블랑(2007년 8월 등정), 12위 이란 다마반드(2009년 8월), 13위 러시아 크루체브스카야 볼케이노(미등정) 등이다. 듣도 보도 못한 산들이 수두룩하다.

이 웹사이트에는 1만 개 이상의 산에 대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중 50개까지 먼저 오른 사람에 대해서 랭킹을 매긴다. 김명준씨는 당당히 네 번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세계 50개 독립봉 기록은 세계 4위

이런 놀라운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그가 왜, 언제부터, 어떻게 산에 오르고, 시작하게 됐는지, 마라톤은 또 어떻게 입문했고, 기록들은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다. 미국엔 왜 가게 됐는지, 기록을 하나씩 이뤄가면서 심정은 어떠했는지,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그를 직접 만나 들어봤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 기록을 가지려면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를 직접 만나 보니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인상에 평범한 체격을 가졌다. 외면상으로 일단 특출한 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내공이 엄청나다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우간다 최고봉 스텐리 정상에서. 마가릿다라고도 한다.
▲ 우간다 최고봉 스텐리 정상에서. 마가릿다라고도 한다.

	터키 최고봉 아라랏다 정상에서.
▲ 터키 최고봉 아라랏다 정상에서.
그는 1995년 즈음부터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산과의 인연이 전혀 없었다. 이북 출신인 그가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어머니와 함께 피란 와서 정착한 곳이 서울이었다. 서울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뒤 취직하고 미국 국제경영대학원에 다니면서 이민을 결심했다. 미국에서 은행을 창립하고, 의류업을 하면서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게 산이었다. 사업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LA 근교의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1995년쯤부터 등산 시작

미국에 갔어도 한국은 수시로 찾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소식도 주고받았다. 당시 서울에서는 서울고 총동문산악회가 창립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상황이라 동문들이 산을 중심으로 많이 모이던 터였다. 그때 그는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19시간 걸려 지리산 종주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면서 우리의 산하를 만끽했다. LA에서는 재미 한인산악회 회장을 맡으면서 본격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

50대 초반 뒤늦게 불기 시작한 취미생활은 활활 타올랐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게 좋아 세계의 산을 올랐다. 킬리만자로, 아콩카과, 엘브루스 등을 오를 때까지는 그랬다. 2002년 매킨리를 오르고 나서부터는 조금 욕심이 생겼다. ‘아! 나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킨리에서 원체 고생을, 아니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산악부 출신도 아니다. 중·고교 시절 아이스하키 운동을 한 게 전부였다. 암·빙벽이라곤 전혀 몰랐다. 암·빙벽을 즐기기 위해 하지도 않았다. 고산에 가려니 필요해서 했을 뿐이었다. 전문가 수준도 아니다. 그런 그가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환호성에 뒤덮여 있을 당시 가이드 두 명과 매킨리를 등정한 뒤 설원으로 하산하고 있을 때였다. 가이드 포함 4명이 팀로프(등반 용어로는 안자일렌, Anseilen·등반할 때 여러 명이 안전을 위해 서로의 몸을 로프로 묶는 행위)로 묶고 조심조심 걷고 있었다. 눈이 녹아 꺼지는지 확인하면서 피해갔는가 싶었는데, “퍽” 하는 순간 순식간에 2명이 크레바스로 내려앉았다. 배낭이 27㎏, 썰매가 15㎏ 정도로 두 사람의 몸무게에 더욱 무게를 더했다. 밑은 시꺼멓게 끝이 보이질 않았고, 고함을 쳐도 메아리가 없을 정도였다. 배낭과 썰매, 스노슈즈의 무게 때문에 자력으로는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여태 지나온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무게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위에서는 엑스트라 로프로 걸치고 최대한 지탱하며 잡아 당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배낭을 벗어 버리고 무게를 가볍게 했다. 스노슈즈도 벗었다.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위에서 잡아당기는 로프도 움직였다. 짐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버렸다. 위에서 로프를 당기고 밑에서는 최대한 무게를 줄여 침작하게 올라왔다.

2시간 반 동안의 사투 끝에 모두 무사했다. 당시 위에 있던 가이드는 그에게 “그런 크레바스는 처음 보는데, 빠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느냐”며 놀라더라는 거였다. 그는 “아마 앞에 있던 친구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벌써 저 세상에 가 있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린랜드 최고봉 에니 베이스캠프에서 세계적인 탐험가 벤 사운더스(Ben Saunders)와 함께 기념촬영했다.
▲ 그린랜드 최고봉 에니 베이스캠프에서 세계적인 탐험가 벤 사운더스(Ben Saunders)와 함께 기념촬영했다.
그렇게 힘들게 매킨리를 등반하고 난 뒤 세계 최정상 에베레스트 등정 욕심이 생겼다. 산에 대한 욕심은 이때가 거의 처음이었다. 등산이 아니고 등정을 하려면 기술도 필요하지만 우선 체력이었다. 그래서 마라톤을 시작했다.

1998년쯤 친구가 암에 걸려 체력을 다지기 위해 같이 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각 대륙 마라톤에 참가해서 완주하는 목표조차 세우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참가하는 데 의미를 둘 뿐이었다. 열심히 뛰고 올랐다. 매킨리 등정 이후 에베레스트 등정 욕심이 생겼을 때는 체력훈련을 어느 때보다 열심히 했다. 고소적응을 위해 멕시코 5,500m 이상 고산지대를 집중적으로 올랐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세계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돼 있었고, 동양인 두 번째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룬 상태였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는 지금까지 70여 회쯤 된다. 1년에 최소 5회는 뛰었다.

남극 마라톤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 가보지 않은 데가 없었고, 비행기에 대한 감각도 있었다. 이 대회는 사위와 함께 갔다. 마라톤을 거의 완주했을 무렵, 비행기 한 대가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저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기상 때문에 남극에서 12일 동안 발을 묶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은 중요치 않았고, ‘저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완주하자마자 바로 짐을 챙겨 사위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사위는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은 사람은 정확히 12일 동안 남극에 갇혀 있었다.

세계 각지로 찾아다니는 마라톤, 등정 등으로 그는 언제,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 궁금했다. 한마디로 누구보다, 어느 사업체보다 정상적으로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다.


	이란 최고봉 다나만드 정상에서.
▲ 이란 최고봉 다나만드 정상에서.

	 모로코 마라톤에 출전해서 완주 직전의 모습.
▲ 모로코 마라톤에 출전해서 완주 직전의 모습.
2002년 매킨리 등반 시 죽을 고비 넘겨

2012년 그의 외국 방문기를 들여다봤다. 공장이 중국에 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 1월 11~21일 홍콩 방문, 4월 30일~5월 10일 중국과 베트남 방문, 6월 29일~7월 16일 중국 방문, 8월 26일~9월 4일 중국 방문 등은 사업상 일정이었다.

마라톤은 3월 18일 LA마라톤, 4월 14일 무어트레일 산악마라톤, 4월 31일 다이아몬드 밸리레이커 마라톤, 5월 19일 비숍 하이시에라 울트라마라톤, 7월 29일 샌프란시스코 마라톤, 8월 18일 아일랜드 레이크자빅 마라톤, 10월 7일 롱비치 인터내셔널 마라톤, 11월 10일 카타리나 에코 산악마라톤 등에 참가했다.

등반한 산은 7월 12~13일 중국 태산, 10월 30일 인도네시아 세메루, 11월 24일 카메룬 카메룬산, 12월 1일 우간다 머그헤리타 등이다. 도대체 철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보낼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지난 9월 7일 중국 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렀다. 17년 전 첫 지리산 종주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당연히 친구들도 “OK”였다. 내심 체력도 테스트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당시엔 19시간 걸렸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될까 싶었다.

서울고 동문산악회 4명과 함께 나섰다. 9월 7일 오후 10시 10분 서울에서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8일 새벽 3시 중산리에 도착해서 3시 40분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일행 중 김명준씨가 제일 컨디션이 좋은 듯 발걸음이 빨랐고 가벼웠다. 바로 어제 서울 왔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어 한 명이 “잠을 편안하게 주무셨나 봅니다?”하고 물었다. 이틀 동안 4시간 정도 잔 게 전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차도 안 맞을 텐데 4시간 잔 사람이 몸이 저렇게 가벼울 수 있는지 다들 의심할 정도였다.

8일 새벽 3시40분 중산리를 출발한 지리산 종주는 노고단에 오후 5시55분 도착, 화엄사에 9시10분 도착을 끝으로 마쳤다. 그리고 구례구역에서 무궁화호 승차 후 익산역에서 KTX로 갈아탄 뒤 9일 오전 1시30분 용산역 도착해서, 그날 오후 4시 LA행 비행기로 서울을 떠났다. 철인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지리산 종주(중산리~천왕봉~노고단~화엄사)도 50대 초반(1995년)에 19시간 걸린 것을 70대(2013년) 들어서 17시간 반 만에 끝내는 철완을 과시했다. 오히려 더 젊어지고 체력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으로 간 것이다.


	대만 최고봉 옥산 정상에서 부인과 함께한 김명준씨.
▲ 대만 최고봉 옥산 정상에서 부인과 함께한 김명준씨.

	인도네시아 최고봉 케린치 정상에서.
▲ 인도네시아 최고봉 케린치 정상에서.
산 때문에 북에 두고온 형님과 만나

산을 다니면서 전혀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재미 한인산악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북한의 명산 등반계획을 세웠다. 단장을 맡아 10명이 방북하기로 했다. 뜬금없이 안내원이 단장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순간 60여 년 전 피란 올 때 생이별한 아버지와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했는데, 그 생각이 그대로 맞았다. 형님과 조카들을 극적 상봉한 것이다. 산 때문에 북에 두고 온 형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꿈보다 더한 현실을 맞이했다. 산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또 있다. 제대로 체력훈련을 하고 등정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대한 수기 공모에 ‘아! 에베레스트’란 제목으로 월간 <신동아>에 응모했다. 원고지 230매가량 쓴 수기가 우수작으로 당선되어 10월 24일 상금 500만 원을 받기 위해 한국에 한 번 더 오게 됐다. 산이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줬다.

그는 왜 산에 가려고 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사실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이 없는 형편이다. 답이 궁색한 것이다. 하긴 정확한 답이 없으니 세상 어느 누구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으리라. 그는 히말라야에 잠든 ‘영원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을 히말라야에서 만났을 때 일화로 대신했다.

그가 먼저 박 대장에게 “자네는 너무 무모하게 등정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왜 산에 가려고 하는가?” 물었다.

박 대장은 “저는 팔자니까 합니다. 근데 선배님은 왜 오르려고 이 고생을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그때 저는 뚜렷한 답을 못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글쎄요, ‘해야 되나보다’ 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박 대장과의 일화를 소개한 건 박 대장의 말이 일부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근데 그는 사업가이지 산악인이 아닌데, 팔자는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번 지리산 종주에서 내 체력상태를 확인했으니 당분간 더 해도 될 것 같아요. 힘닿는 데까지 할 생각입니다. 마라톤도 뛸 수 있는 데까지 뛸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70세가 넘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안 하면 아무 것도 안 되더군요. 세계 50개 독립봉 전부는 다 못 할 것 같고, 무리하지 않고 되는 데까지 할 겁니다.”

목표가 뚜렷해야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외견상 전혀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성한 그의 기록을 보면 목표가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정말 강해도 너~무 강하다. 드러내 보이지 않은 그의 ‘내공’ 덕분일까. 정말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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