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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섣달


동지(冬至)가 작년 12월 22일 경이니 이미 지난 절기다. 문득 달력을 보니 음력설이 2월 14일이었다.
그러므로 동지는 지났어도 음력설로 기억되는 마지막 달, 섣달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예전 그 흔했던 팥죽도 못 먹었은 동지는 아련한 추억 속의 풍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음력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꽉 찬 보름달 때문이다.
미국 살면서 보름을 말하는 풀문(Full Moon) 보다 나는 아직도 보름달이라는 조선 어감이 좋다.


달이 가장 크게 원형을 이룬다는 음력 보름. 이곳 미국 땅도 예외는 아니어서 꽉 찬 만월(滿月)은 더욱 크게 보인다.
110번 프리웨이였던가? 밀리는 차량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크고도 누런 보름달이 다운타운 빌딩 위로 떠올랐을 때,
이민 생활에 잊혀진 설날을 기억해 낸 것은. 그 함지막 만한 만월 풍경을 보며 진저리친 기억이 새삼스럽다.


어제 산악회의 계획에 따라 주말 산행에 나섰다. 엘에이를 벗어나 아이스 하우스 캐년에
접어들었을 때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계곡 끝 팀버라인 준령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파인트리의 청정한 푸른빛과 대비되는 콘트라스트는 지금이 겨울이고 눈 풍년임을 일깨워 주었다.
고요히 침잠한 산은 조용했으며 아름다웠고 충분히 그윽했다.


장비를 챙겨 본격적으로 나선 산행 길에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물은 산이 싫어 아래로 내려가는데 우리는 산이 좋아 거슬러 오른다.
고도를 높이며 하얀 눈에 점령당한 계곡은 완벽한 수묵산수화였다.
포근한 눈 속 적막강산을 훠이훠이 걷는 느낌이 좋다.
눈꽃을 피워 낸 소나무 가지는 그 무게에 눌린 듯 축축 처져 있지만
설화를 무수히 달고서도 그 뾰족하고 청정한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터를 지나자,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들린다.


목탁이라... 설국을 이룬 산 속 서늘한 대기 속에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들은
아우성치며 즐겁게 일어서고 있었으나 생경한 목탁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미국에서, 그것도 인적 없는 아이스캐년 산 속에서 목탁소리라니....


목탁소리의 주인공은 딱따구리였다. 소리를 좇아 시선을 고정시키자
상수리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눈에 들었다. 그렇게 가깝게 딱따구리를 만나본 적이 없다.
산행 중에 어쩌다 아련하게 들리는 딱따구리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그 현장을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딱따구리.jpg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새를 바라봤다. 딱따구리도 나를 보았겠지만
아예 사람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일을 계속한다.
늙은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쪼는 딱따구리에게는 먹이를 찾는 행위였겠으나
 그 소리가 꼭 한국 절 집에서 듣던 목탁소리를 닮았다.


당연히 목탁도 나무로 만든다. 오히려 가공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목탁을 상대로
딱따구리의 스피디한 헤드뱅잉은 그칠 줄 모른다. 똑 또르르 똑또르.
단조롭고도 규칙적인 목탁 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바라보는 내 마음을 흔든다.


산정엔 어머님이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만든 누비이불처럼 눈이 공평하게 덮고 있다.
눈 밭에 찍힌 새 발자국이 꼭 어머님의 이불의 바늘 자국으로 보였다. 포근한
누비이불 속에서 형제들이 오종종 잠들었던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방구들이 따듯해서, 무명 이불의 감촉이 포근해서
어서 일어나라는 어머님의 깨움에도 더 파고들었던 무명 이불 속.


똑 또르르 똑또르.


딱따구리는, 어쩌면 이제 산도 겨울잠에서 깨어나라고 목탁 소리를 내는지 모른다.
동지도, 대한(大寒) 소한(小寒)도 이미 지났지 않은가.
긴 겨울잠에 빠져 있는 늦잠꾸러기 대지에게 이제 봄이 가깝다고 깨워내려는 딱따구리의 몸 보시.
겨울 숲 어딘가에서 분명히 잠자고 있을 봄을 깨우려는 울림, 똑 또르르 똑또르.


문득 산 속에 갈아 앉은 침묵을 쪼아 깨우는 딱따구리의 행위에서 나는 머지않은 봄을 발견한다.
딱따구리가 깨워 낼 봄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희망이 기다린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 분명히 봄은 머지않다.


“알지?” “알아!” 곁에 아무도 없음에도 스스로 묻고 답한다.


몸으로 두들기는 목탁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고도를 올리며 눈은 더 깊어졌다. 응달에선 나무들 가지에 고드름이 줄지어 키를 키우고 있었다.
고드름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처마 끝에 서서 지붕의 눈이 고드름이 되는 과정을,
그 고드름 뾰족한 끝에 달린 물방울을 또 오랫동안 지켜본다.
물이 눈이 되고 고드름이 되다가 다시 물로 환원되는 윤회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시간은 눈(雪)이었다. 아니 고드름이었다. 아니 물(水)이었다.


아이스 캐년 눈이 얼음이 되고, 다시 물이 되어 계곡을 채우고 흐르는 사실적 물의 윤회.
시간은 그렇게 원시반본을 계속하며 내게 깨어있으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잉태하고 성장시킨 눈, 혹은 물은 계곡으로 긴 여행을 시작한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다. 계곡이 강이 되고 바다에 이르러 다시 구름이 되어 겨울눈으로 환원되는 물의 윤회.
원시반본 고향을 찾아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물의 윤회.


딱따구리는 그 자연의 이법을 찬탄하는 염불을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산 길, 아이스 캐년을 에두른 산과 숲이 눈 속에 더 포근하게 보였다.
하산 길, 딱따구리 목탁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깨우침은 한번으로 족하다.
깨어 있으라 가슴을 흔들던 똑 또르르 똑또르 목탁 소리는 이미  
가슴에 담겼다.


딱따구리 2.jpg 

그날 산행을 마친 뻐근한 몸을 차에 싣는 순간,
 다시 바라 보였던 눈 덮인 아이스 캐년 겨울 풍경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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