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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길, 과거 길


                                                                 

    겨우 걸었다. 나는 늘 모든 것을 겨우 한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여 겨우 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겨우 라도 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 진한양념으로 버물어진 일상을 탈출 해 보고 싶었다. 웬 만한 자극으로는 삶의 맛을 찾기 힘들었다. 낯선 곳으로 가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어 보자고 했다. 양념 없는 신선한 재료로 무작정 걸어보기를 택했다. 어렵게 걸은 만큼 더욱 침잠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발바닥, 발가락, 발뒤꿈치 까지 온통 물집 투성이었다. 신발이 문제였다. 물론 신발의 중요성을 얘기 했다. 내 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신발을 타고 가는 것이라 우리는 충분히 신발에 대해 논의했지만 뾰족하게 또는 자신 있게 안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조건 가벼운 것이라야 된다, 아니다 평소 신던 등산화가 좋다 그저 그런 의견에 그쳤다. 나중에 겪고 알게 된 결론은 제 아무리 충직한 신발도 지나치게 오래 부려먹으면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제일 고생한 것은 그들의 발 이었다. 일행모두가 산행을 많이 한 처지들이라 대충 자신감으로 버틸 여는 눈치들이었다. 모두들 짐 줄이기에 만 집중했다.


 5월 10일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출발하여 꼬박 일 주일은 각종 신음으로 버텨냈다. 첫날, 둘째 날 30 킬로미터 이상을 걷고 나니 물집이 여러 군데 잡혀 버렸다. 셋째 날은 반갑지 않은 비가 내려 더하기 빗물로 물집이 불어 터져 발이 만신창이 됐다. 내 발은 내 발로 태어난 것이 심히 불만이었을 것이다. 발한테는 정말 미안했지만 좀처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라남도는 어떻게 든 걸어내고 싶었다. 왜냐하면 매일 새로 맞이하는 도시마다의 강력한 메뉴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게 무침, 세발낙지, 짱뚱어탕. 꼬막, 밴댕이젓, 갓 잡은 한우 고기, 그리고 천지빛깔의 나물들과 밑반찬. 이들 음식과 함께하는 반주에 취하고, 전라남도 길에 취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너른 평야에는 허리 구부러진 나이 드신 농부들의 드문드문 움직임만이 오로지 고즈넉한 동적현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는 뻐꾸기 소리에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듯이 보였다. 밥을 만들기 위해 모를 심는 그들의 모습은 ‘벌이’ 로는 볼 수 없는 숭고한 맥을 잇는 예술 작업이었다. 그 곁을 나는 ‘벌이’는 안 하고 는적는적 계면쩍은 걸음을 걷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일행 중 누군가는 어쭙잖게 배낭에 태극기를 꼽고 있었다. 적어도 뭔가 하고 있다고 표시라도 내듯이. 편치 않은 걸음걸이로 장흥에 이르러 동네 평상에서 쉬고 있던 중, 드디어 한 할머니께서 딱하다는 표정에 궁금증을 보태어 한 말씀 하신다.

“ 이렇게 걸어 다니면 나라에서 돈 주요?”

“ 아~~니요. 돈 내고 걸어야 돼요”

“ 돈도 안 주는 데 왜 고생을 장만하고 들 다닌 다냐?”

맞다. 우리는 어처구니없게 고생을 장만하여 등짐 지고 다니고 있었다.


 하루에 고된 발 노동을 끝낸 쌈빡한 저녁식사에 단골식단은 남자들의 꼼수였다. 지도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뚫어지게 지름길을 찾고 또 찾는다. 거리를 단축하기위해 터널을 지나고, 산을 넘고, 때로는 내를 건너기도 했다. 시원한 아침에 많이 걸어 두려고 아침 7시면 어김없이 간밤에 잤던 숙소 마당에 모였다.

 5월 16일 전남 화순에 도착 했다. 많이 지쳤다. 다시 폭우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안양산 자연 휴양림에서 하루 휴양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 발은 다시 폭우 속을 걷기가 힘든 상태여서 서울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떠나려니 아픈 발만큼이나 마음이 저려왔다. 하지만 내가  꼭 지나가고 싶은 문경새재, 새나 넘을 수 있는 험한 고개라니 쉼이 필요했다.


 5월 22일. 다음 날 문경을 지난다는 전화를 받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첫차를 탔다. 일주일 남짓 쉬는 동안 미국에서 엄마를 보러 한국에 온 아들과도 지내고, 발의 물집도 꾸들꾸들 해졌다. 내가 평소 신던 등산화와 발가락양말로 재정비를 했다. 짐도 지난번의 반으로 줄였다. 그 후로 6월 3일 마지막 귀착지인 고성 통일전망대 까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발은 해탈을 했다.

  문경은 옛 과거 길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지나면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다른 지방의 선비들 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연유로 앞으로 남은 인생의 시험을 잘 치루고 싶고, 아들의 소원 보따리도 꼭꼭 싸

서 가져가 통과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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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로 올라가는 길은 세 개의 관문으로 되어 있었다. 제 1 관문을 지나면 새재 길이 시작된다. 맨발로도 걸을 수 있게 황토 길이 잘 다져 있다. 그러고 보니 국토를 걸어오면서 처음 흙길을 만난 셈이다. 길 옆 계곡에서는 물이 흘러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길가 도랑을 타고 흐르는 물로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과거의 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일지매 같은 의적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초가로 집은 주막집이 보인다. 한양 길을 오르던 선비들, 등짐 지고 장사를 하던 보부상들 이 이곳에서 쉬어갔음 직하다. 우리도 예서 목을 축이고 가련다. 주막 집 앞에 시 한 수가 돌에 새겨 있다.

    -새재에서  묵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 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새재의 마지막 옛길의 올라가는 길은 ‘장원급제 길’ 내려오는 길은 ‘금의환향 길’ 이라 되어 있다. 이렇듯 과거의 길, ‘과거 길’ 을 통과 했다. 힘겹게 국토를 걸어 낸 것으로 어떤 한 가지 시험을 잘 치렀다고 믿고 싶다. 충만하다.

 마지막 관문을 지나면 구수한 충청북도가 나오고, 굽이굽이 산길을 도는 빛나는 강원도,  비릿한 동해에 바닷길을 따라 마침내 통일 전망대에 꼭짓점을 찍고 금의환향 했다.


 국토종주를 하면서 인생의 배낭에서 짐을 줄이는 연습을 했다.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없는 가운데도 당차게 이겨나갈 수를 익혔다.

걸으면서 시간의 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변화가 있어 빛의 사그라짐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왔다. 알 수 없는 서러움 또한 몰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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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k 2009.07.23 12:04

    민디씨,

    국토종주 마침을 축하해.

    "국토종주를 하면서 인생의 배낭에서 짐을 줄이는 연습을 했다" 는 말..........

    내 마음에도 새기며 나또한 짐 줄이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9월에 티벳, 히말라야원정에 함께 갈수있어 반가워요.

    우리 함께 잊을수없는 우리 삶의 중요한 시간이 될것을 믿어요.

    그럼 조만간 만날것을 기대하면서.......

      

    Over Valley And Mountain

  • tk 2009.07.23 22:39

    첫번, 두번째 사진이 보이질 않네요..

  • 나마스테 2009.08.03 14:32

    민디 작가.

    갈 수록 내공이 깊어지는군요.

     

    길이 끝나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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