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Ⅰ신영철 편집이사  사진Ⅰ장정모   통역Ⅰ이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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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zabeth Hawley

 

 

시집을 안 갔으니 홀리 여사는 처녀가 맞고, 또 미스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럼에도 눈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미스 엘리자베스 홀리’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뒤가 간지럽다. 무려 여든여덟 살이니까…

사람을 중간에 넣어 만나자고 전했을 때 그녀는 오은선 문 제 때문에 한국에서 일부러 온 것이냐고 물었다.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시비로   발칵 뒤집힌 한국 언론에게  몹시 시달린 뒤라 그럴 것이었고 그보다 홀리는 인터뷰 자체를 꺼려 언론에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드물기도 했다.

 


한국의 히말리스트들만 알고 있던 홀리는 ‘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시비’로 한국에서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  때문에 홀리를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했다.

저   당신에 대해 궁금해 하는 한국인이 많고 그래서 만나보고 싶은 것 이라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의 휴먼스토리, 일테면 시집도 가지 않은 채 50여 년간 등반만 기록하며 네팔에 살고 있는 이유, 젊은 날의 러브스토리, 에드먼드 힐러리가 만든 히말라야 트러스트 관련 이야기, 당신이 만났던 세계적 알피니스트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궁금해서다.

그리고 당신에게 인터뷰를 몇 번 당했던 인연이 있으니까 이번엔 내가 인터뷰할 차례가 됐다.


오은선 덕분에 한국에서 유명해 진 홀리
소음과 무질서의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 집 앞에는 종처럼 생긴 붉은 꽃‘ 벨 플라워’가 무리지어 피어 있다. 한국은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지만 네팔의 기후는 꽃피는 아열대라는게 분명했다. 정문에 경비원이 있는 고급 저택 몇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데, 홀리의 집은 2층 건물이었고 그녀는 이 집에서만 40년째 살고 있었다.


안내 받은 2층에서 돋보기를 코에 걸친 홀리가 마중 나왔다. 자연 채광으로 실내는 좀 어둑했고 여 비서는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 중이었다.
“미스 홀리, 나를 기억하는가? 그동안 당신의 일 때문에 공식적으로 4번이나 만났었는데.”


히말라야 등반사의 살아 있는 화석.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1 985년.

등반에 대한 세계적 저널리스트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홀리는 26년 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할머니급 처녀였다. 그때 나이도 이미 62세였으니까. 그때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폭스 바겐 차를 몰고 우리 원정대를 찾아 왔었다.

 

 홀리는 코에 걸친 돋보 기 너머로 나를 잠시 응시했다.
“노우. 미안하지만 하도 산악인들을 많이 만나 누군지 모르겠다. 사람보다는 당신이 등반한 히말라야 이야기를 하면 내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언제나 정확하니까.”


역시 홀리였다. 50여 년 동안 세계의 5000팀이 넘는 히말라야 등반대를 만났다. 대장만 오천명이 넘는다는 말이니 하물며 몇 만 명이 될 대원까지 기억할 수는 없겠다. 그런 원정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그녀의 역작‘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업은 비공식적인 연대기지만 공식 기록에 가장 근접하다는 국제 산악계 평을 듣고 있다.
한담 속에 그녀는 내가 등반한 산을 찾아냈고, 그녀에게 익숙한 인터뷰라도 하듯 이내 친근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지금도 라인홀드 메스너를 포함한 히말라야 스타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는가? ”
“그렇다. 나는 많은 히말라야 영웅들의 등반과정과 그 변화를 지켜 본 사람이다.  1 4개의 8000미터 고봉을 최초로 오른 메스너는 처음엔 시골뜨기 같이 보였다.  덥수룩한 자기 머리 스타일 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데 지금도 가까운 친구로 남아 있다.”

베이스캠프도 가보지 않은 홀 리는 히말라야 등반사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그녀는 생의 대부분을 히말라야 등반기록 으로 채우며 늙었다. 
“언제부터 산악전문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한국에 대하여 안 것 은 언제였나? ”
"뉴욕타임스 계열사 포춘에서 1 0여 년 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1 957년 그만뒀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2년간 소련과 동유럽, 중동, 동남아시아로 떠돌았다. 그때, 한국도 방문했다. 1 959년이었는데 한국은 전쟁의 참화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놀라운 일이다. 생각으로도 아득한 시간 뒤쪽에서 홀리는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고, 부산으로 상륙해 육로로 서울까지 갔었다는 말이다. 당찬 처녀 홀리에게도 당시로서 모험에 가까운 여정이었을 것이다. 슬쩍 셈을 해보니 보니 홀리는 그때 나이가 이미 30대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1 960년 당시 네팔 여성은 종교 때문에 사회적 제약이 심했다. 그런 카트만두에 혼자 살고 있는 삼십 대의 외국 여성이니 주변의 호기심이 굉장했다.”
카트만두에서 로이터 통신원으로 일하던 홀리는, 에베레스트를 첫 등정한 미국 원정대 기사를 전 세계에 타전하며 산악전문기자로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런 힘든 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 좋은 직장 그만두고 정처 없이 떠나야 할 이유가 있었나? 어떤 정신적은 쇼크, 일테면 실연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있었나? ”


이윤경씨 통역을 거쳐 내 말을 듣자 홀리가 웃었다. 원래 무표정하기로 소문난 홀리가 웃다니. 뜬금없는 질문이라 웃었을까. 그것이 또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난 사랑을 해 본적이 없다. 그저 기자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두자. 미지의 세계를 좋아했다. 호기심. 그것이 젊은 날, 내 방랑의 전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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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는 장수를 누리고 있는데
앞서 카트만두의 한국식당‘ 정원’에서 철지난 <사람과산>을 발견했다. 거기엔 내가 인터뷰한 일본 산악인 오사무 다나베가 사진으로만 활짝 웃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그는 세상을 등졌다.
예전처럼 자신의 아내가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눈사태로 죽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걸 챙겨왔다. 홀리 역시 오사무 다나베를 인터뷰했을 것이고 그의 죽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을 펼쳐 고인의 사진을 보는 순간 홀리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게 우에무라 나오미와 함께 등반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이니 1 979년인가? 그 후 한 5번은 만난 것 같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히말라야에서 죽었다. 언제나 죽음은 히말리스트에게 따라다니는 숙명 같은 그림자다.”


기실 홀리 말대로 그녀를 거쳐 간 많은 산악인들이 산에서 죽었다. 그들은 유명했고 자국의 영웅이었으며 좀 더 진취적 등반을 했으므로 그렇다. 기록자는 장수를 누리고 행위자는 죽는다. 참 아이러니다.


“언제 네팔에 정주할 생각을 했는가? ”
“처음으로 네팔을 찾은 것이 1 960년 9월. 앞서 말한 여행 끝이었다. 그때 나이 37살. 처음 찾은 네팔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세상 끝까지 온 느낌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준비를 한후 1962년에 다시 네팔로 와 지금까지 머물게 되었다. 그때는 미국 산악잡지 <알피니스트> 기자와 <로이터>의 통신원 자격이었다.”
산과는 전혀 관련 없던 홀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히말라야를 찾는 원정대를 인터뷰하고 등정 여부에 관련된 기록을 정리했다. 그렇게 50여 년 간의 기록을 책으로 발간했고 지금도 운영하는 웹페이지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The HimalayanDatabase)’의 시작이다.

그것이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살아있는 유일한 증인으로 홀리에게 세계적 권위를 주게 된 동기였다.

“첫 책은 2003년에 나왔는데 그동안 직접 인터뷰하고 모은 기록에다, 덧붙여 1 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 히말라야 등반사였다. 현재 데이터베이스에는 2009년까지 기록되어 있고 2010년은 작업 중인데 그 속에 내 모든 에너지가 들어 있다.”
“취재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
“원정대가 카트만두에 입국할 때 한 번, 그리고 등반을 끝내고 카트만두를 떠나기 전 한 번. 총 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등반을 기록한다. 이것이 모든 원정대에게 주는 질문지다.”
서식을 보여주는 홀리의 표정은 할머니처럼 온화했으나 산  이야기를 할 때면 안경 뒤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5000번이 넘는 원정대 인터뷰를 통해 단련된 그녀만의 노하우. 절대 속지 않는다는 듯 예리한 질문을 퍼부어 대는 것으로 그녀는 정평이 나있다.

수많은 인터뷰를 통한 간접 경험만으로도 그녀는 대상 산의 등반루트와 정상부를 소상히 알고 있으므로 비
교 가능한 일이다.


홀리의 기록이 있으므로 세계 산악계는 히말라야에 대한 바른 정보와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베이스캠프 근처에도 가지 않은 홀리가 세계 산악인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 이유는, 그 방대한 기록에 평생을 바친 노고를 평가해서다. 그래서 일까, 2008년 5월 프랑스 산악인 프랑수아 다밀라노는 히말라야 미등봉 61 82미터를 단독으로 초등하며 그 봉우리에 ‘피크 홀리(Peak Hawley)’라는 이름을 붙였다. 홀리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일이 힘들어 지반 등 네팔인 보조 기자를 3명 두고 있다. 그런데 곧 4명이 된다. 미국인 리포터 한 명이 추가될 계획이다. 관광성에 등록한 원정대는 물론 그 외도 다 챙긴다.”
이렇게 꼼꼼하다보니 홀리의 자료가 네팔 정부보다 많다는 말이 떠돈다. 그런 면이 확대 재생산되어 현재의 그녀를 히말라야 등반계의 산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기록도 그렇지만 그녀는 사는 것도 참 고집스럽다. 집도 40년이 넘고 타는 차도 오십 살이라니.
“아직도 뉴질랜드 명예 총영사직을 수행하고 있나? ”
“에드먼드 힐러리의 주선으로 1 990년부터 뉴질랜드 명예 영사직을 맡아왔었는데 4개월 전 그 직을 그만 두었다. 하나하나 정리해야할 나이니까.”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침침한 방을 둘러봤을 때, 어디든 힐러리 경의 흔적이 보였다. 힐러리에 관한 많은 책, 그리고 크고 작은 그의 사진들.


에드먼드 힐러리와의 추억
“당신의 일생에서 누군가 죽도록 사랑한 적이 있는가? ”
할머니급 노처녀 가슴에 시퍼렇게 간직하고 있을 상처를 혹 건드리는 건 아닌가, 겁이 났지만 그 나이에 어쩌랴 싶었다. 또 그 질문엔 네팔 세간에 떠도는 오랜 소문 확인도 이참에 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그녀와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네팔에 자자했다.
“호호. 무엇을 알고 싶은가? 나는 가슴이 메말라 미국에서나 네팔에서 사랑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남자친구를 부를 때‘ 굿 프렌드’라 부른다. 내 인생에 단 한명의 굿 프렌드라면 힐러리다.”
홀리가 주름 가득한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사랑 타령에 그녀가 웃었다. 드문 모습이다. 웃는데 인색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홀리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1 972년이었다. 힐러리가 이곳에 오면 날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운영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일을 하려면 내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당시엔 외국인이 몇 없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러운 일 이었다. 힐러리가 세운 재단‘ 히말라야 트러스트’ 네팔 쪽 책임자가 바로 나다.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힐러리의 자리였다. 우리는 몇 시간이나 지금처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은 독신주의자인가? 젊은 시절 홀로 사는 멋진 산악인들을 많이 만났을 텐데.”
홀리가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에 인색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녀가 인터뷰 도중 보기 드문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팔에 거주하며 여행사를 운영하며 사진을 찍는 장정모씨가 이렇게 자주 웃는 홀리는 처음 본다고
말할 정도. 사랑이야기는 원래 그렇게 말랑한 것인가보다. 팔순이 넘었지만 홀리는 처녀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 평생 사랑을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유일한 굿 프랜드 힐러리는 1 975년첫째 아내와 딸을 카트만두 공항에서 비행기 사고로 잃었고 일 년 후 동료 산악인의 미망인과 결혼해 두 번째 가정을 이루었다.”
홀리는 힐러리 경을 추억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두 번째 가정을 이루었다’는 대목에서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굉장히 좋은 친구. 굿 프랜드. 이런 말들의 행간에 숨어 있는 퍼즐은 무엇일까?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분명한 것은 힐러리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홀리는 말에 생기가 돌았고 웃음이 많았다는 점이다.


홀리가 앞서 말한 힐러리 재단인 내셔널 트러스트는 쿰부지역에 많은 학교, 보건소, 다리를 건설했다. 진정한 산악인 힐러리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쿰부지역 집집마다 사진으로 모셔져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이 집에서 조문객을 받았다. 저 책상에 힐러리 흑백 사진을 놓아두었는데 네팔 수상과 외무부 장관도 찾아왔다. 조문 기간이 끝나자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엔 나도 초대되었다. TV 아나운서도 검은 상복을 입고 3일간의 국장으로 마지막 영웅의 떠남을 기렸다.”
당시에 나 역시 대한산악연맹 관계자들과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에 조문을 간 적이 있었다.
“힐러리는 그의 모국 뉴질랜드뿐 아니라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휴머니스트였다. 1 953년 에베레스트 등반이 끝나자 함께 정상 에 올랐던 텐징 노르게이의 고향 솔로 쿰부 지역 쿰중에 최초의 학교를 만들었다. 그의 네팔과 히말라야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었고 구체적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뉴질랜드 하면 롭 홀(Rob Hall)이라는 산악인이 떠오른다.
그는 1 996년 에베레스트에서 죽었다. 그런데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롭 홀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히말라야 등반을 상업화시켰다. 그의 상업등반대에 속해 있던 대원들과 다른 상업등반대까지 그때 모두 1 6명이 죽는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같은 뉴질랜드 동향인 힐러리 경은 이미 롭 홀에게 그따위 상업등반대를 당장 때려치우라고 일갈했었다.
“산은 존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 불행을 부른다. 아무리 돈이 권력이라는 세상이지만 에베레스트는 그 권력이 침범하기에는 너무 신성한 곳이다.”
뉴질랜드 신문에 난 기사에 롭 홀은 투덜거렸으나 감히 힐러리에게 맞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힐러리의 예언대로 에베레스 트에서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한국 원정대와 오은선 문제
“한국 원정대도 많이 만났을 것이다. 그들의 산(山) 철학, 등반 방식,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아시아 등반가들을 많이 기억한다. 우에무라 나오미, 다베이 준코, 엄홍길, 오은선 등…. 유럽과 아시아의 등반방식은 두 문명이 다른 만큼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서양도 지금의 동양처럼 원정대장의 절대적 권위 하에 군대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오래전 그런 극지법은 유럽에선 없어졌다. 동양엔 아직도 그런 방식이 남아 있지만.”


홀리는 안경 넘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 속엔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한국은 1 980년대 들어서 원정대 수가 급증했다. 경제성장의 반증인데, 그건 통계가 증명한다. 일본도 그랬고 다른 나라들 역시 그러하다. 한국 산악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좋은 산악인들이지만 너무 셰르파 의존도가 높다. 그리고 셰르파를 앞세워 위험한 루트를 개척하도록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에 집착한다. 그런 점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산악인끼리 질시와 반목이 있는 것 같다. 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시비에 대해 가장 강력한 문제제기는 한국인이 했다.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구체적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불거진 의혹을 무시하다가 이해 당사자인 스페인 에두르네 파사반이 찾아왔다. 그녀는 한국의 문제제기 이야기를 하면서 내 기록에서 자신을 여성 세계최초 완등자로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말을 잘랐다.

“오늘 인터뷰는 오은선 문제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결론이 없을테니까”

말을 자른 이유는 모호한 이야기로 귀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또 오은선 부분에 대한 홀리 생각을 이미 그녀의 홈페이지와 보도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안다. 등반 방식과 산(山) 철학을 설명하려 예를 든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오은선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사 아닌가? 엄청 많은 한국 기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마치 언론은 내가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권위가 있다고 표현하는 때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등정에 관한 국제적 공인절차는 따로 없다. 그러므로 내 기록 역시 철저한 기록일 뿐 그것이 등정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등반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이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다. 한국인과 파사반 측이 의혹을 제기했고 나는 그것을 들었다. 오은선의 등반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맞지 않나. 논쟁 중이기 때문에‘ 논쟁 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되도록 피하려했던 ‘오은선 문제’를 스스로 말하며 홀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논란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엄청 많은 한국 기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마치 언론은 내가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권위가 있다고 표현하는 때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등정에 관한 국제적 공인절차는 따로 없다. 그러므로 내 기록 역시 철저한 기록일 뿐 그것이 등정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나는 등반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 이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다.”

홀리는 두 번이나 기록자임을 강조했다. 그 만큼 사안의 중대성을 의식하는 것일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아퀴를 짓고 싶었다. 스스로 기록자라는 겸양을 보이고 있음에도 한국 언론은 자연인 홀리를 '판정관' 쯤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오은선 문제는 어떻게 귀결될 것으로 보는가?”
“오은선의 칸첸중가 논란은 영원히 미스터리 일 것이다. 나는 내 기록에 등정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논란중이란 점도 명시하고 있다. 파사반과 한국의 몇몇 대장들은 그녀의 등정을 부정하고 있으나 미등정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등장자라는 것과 논란 중이라는 내 기록은 바뀌지 않을 것 이다. 현재 업데이트 중인 데이터베이스에는 그렇게 주장하는 한국을 포함한 그 사람들 실명을 써 넣을 예정이다.”
“언젠가는 진실이 규명되지 않을까? ”
“절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다. 등정하지 못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지만 등정을 입증할 만한 사실도 모자란다. 얼마 전 한국의 대한산악연맹(KAF)과 한국산악회(CAC)에 이 문제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두 단체 역시 상이한 답변이었다. 한 군데는 등정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 곳은 못 올라갔다고 했다. 바로 그거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
어느 사이 대화는 피하려 했던‘ 오은선 문제’로 깊숙히 넘어와 있었다.
“한국엔 SBS라는 방송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당신을 인터뷰한 영상을 봤다. 거기서 당신은 오은선 등정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말했는데.”
“그 이야기는 들었다. 부정적이라니, 그건 내 말을 심각하게 왜곡한 부분이다. 당신에게 말한 대로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오은선의 등정을 부정하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건 사실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당신에게 한 말 그대로 전했는 데 왜 그런 방송이 나갔는지, 문제가 있다.”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던 홀리가 느닷없는 말을 툭 던졌다.
“오은선은 불쌍한 여자다…… 믿을 수없는 위업을 이뤄냈으나 제대로 평가를 받기도 전에 상처를 입었다. 그녀 주변엔 많은 적들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그 사람들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 적이 없다. 물론 오은선과 등반했던 다와 옹추, 페마, 누루부 셰르파들을 만났다. 누루부는 말이 자주 바뀐다. 등정하지 못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더니 소식이 없다. 나머지 두 명은 최근까지 등정을 주장하고. 모든 걸 종합해 보면 오은선이 자신의 등정을 믿듯 나도 1 00퍼센트 그녀의 등정을 믿는다.”


오은선에 대한 홀리의 주장은 이미 데이터베이스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새로울 게 없었다. 결론 없는 대화는 무의미했다. 대화를 바꿔 보기로 했다.


“때로는 고향이 그립지 않은가? ”
“1 993년 마지막으로 고향 미국의 콜로라도를 갔다. 조국이지만 내게는 이상한 나라였다. 멕시코계도 그렇지만 아시안 이민자들이 그 사이 많아졌더라. 꼭 그래서만은 아니더라도 미국보다 네팔에 더 오래 살아 미국 문화가 영 생경스러웠다.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 후엔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미국을 잊었다. 그때 느낀 것은 내 고향은 이미 네팔이고 이곳에서 죽겠다는 것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면 고향을 생각한다는데사람임에랴! 그러나 그런 짐작은 틀렸다. 홀리는 네팔이 고향이며 이곳에서 죽겠다고 말한다.


네팔은 이미 나의 고향, 생의 마감도 이곳에서
“언제 은퇴할 것인가? ”
“몸은 말을 듣지 않지만 머리가 움직이는 한 내게 리타이어는 없다.”
대답이 간단하다. 88세에 명료한 정신과 일에 대한 의욕을 놓지 않는 키 작은 고집스러운 노인.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승에서의 삶에 그녀는 스스로 자족했을까. 그건 알 수 없더라도 등반사라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홀리의 삶은 역사적일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본지에서 원고 청탁을 하고 싶은데, 충분한 지면을 할애할 용의가 있다.”
“좋다. 이메일로 원고 방향과 분량, 송고일, 원고료를 명시해보내 달라. 단 방송처럼 내 글을 고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이게 그녀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까지 배웅한 그녀는 어느새 웃음기 없는 냉정한 표정 으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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