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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좌 완등’ 도전 … 오은선 안나푸르나 동행취재








[중앙일보] 2009년 10월 12일(월) 오전 04:07

 오은선(43) 대장을 10일 베이스캠프 그녀의 텐트에서 만났다.

“계속되는 악천후에 마음 고생이 많으시죠”라는 인사에 “
안나푸르나 여신이 쉽게 오를 생각 말라고
경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말은 그래도 오 대장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 완등에 대한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오은선 대장은 지난 2일 고도 7700m에서 돌아섰다. 정상은 그곳으로부터
고도차가 불과 300여m에 지나지 않았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돌아설 때 갈등이 많았겠습니다.”

오 대장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도 미련이 많았지요. 그러나 올라간다 해도
하산이 걱정이었습니다. 같이 등반하던
김재수·김홍빈 대장팀에 ‘우리는 내려간다’고 말했습니다.
김재수 대장이 만류하더군요. ‘30분만 기다려봅시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지요.
어떻게 올라간 곳인데요 미련이 왜 없겠어요.”

알 만하다. 빙하를 가로지르고 픽스 로프에 의지해 암벽을 넘어 만든 전진 베이스 캠프와 1캠프,
김재수 대장팀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상습 붕괴지대와 가파른 설면을 지나 세운 2캠프,
히든(숨은) 크레바스와 판상 눈사태 지역인 3캠프까지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위험을 감수했는가. 그것도 무산소로.

“날씨가 바뀌겠지라는 기도를 하며 웅크리고 앉아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세 시간이면 오를 수도 있었던 정상의 유혹을 떨친 오 대장의 용기가 새삼스럽다.

“그럴 때 저는 과감해요. 한번 결정하면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옵니다. 산이 받아준다면.”

오은선 대장은 내내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강조했다. 자연에 맞서기보다
맞춰가는 지혜를 터득한 듯했다.

1차 등반 시도에서 실패하고 철수해 베이스 캠프에서 악천후와 싸우는 동안
셰르파들이  더 이상 등반하지 못하겠다면서 집단 하산하겠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사일생의 1차 등반 시도와 김재수 대장팀의 눈사태 사건 이후 겁을 먹은 듯했다.
눈사태의 후폭풍으로 다큐멘터리 PD 한 명이 다리를 다쳐 헬리콥터로 후송되기도 했다.
히말라야에선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간단히 갈리는가.

셰르파를 상대로 오 대장은 설득작업에 나섰다.
 “무모하게 목숨을 바치란 얘기는 안 한다. 나와 함께 등반을 한두 번 했는가.
나를 이해하고 믿는다면 함께 가자. 안나푸르나의 신이 받아준다면 분명히 한 번 더 기회가 올 것이다. ”
두 명의 셰르파는 끝내 등반을 거부했으나 나머지는 오은선 대장의 의지를 믿었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대해 오 대장은 “역시 인간에게 빛은 좋은가 봐요. 힘이 솟아요.
 다시 시작해야죠.
 초조할 것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오은선 대장 옆엔 모리스 엘조그가 쓴 책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가 보였다.
엘조그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면서 인류 최초의 8000m급 고봉 정복자가 됐다.
그의 책으로 인해 산악인들에게 안나푸르나는 가장 인상 깊은 고봉 중 하나로 추앙되고 있다.

“7700m 고지까지 올라가 보니 엘조그의 묘사가 정확하던가요”라고 물었다.

“루트가 달라 그런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느낌 엔 동의합니다.
지금 하산 부분을 읽고 있는데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함이 제 하산 경험과 오버랩 되더군요.”
오은선 대장은 진저리를 쳤다. 이해가 간다.
엘조그는 하산 시 손가락 열 개와 발가락 열 개를 등정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정상 직전 마지막 캠프에 무엇을 두고 왔느냐”는 질문에 오 대장은
 “카타(셰르파족의 행운을 기원하는 천)에 싸인 산악인 고(故)
고미영의 사진을 두고 왔다”고 말했다.
오은선 대장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불쌍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을 만큼 약하게 살지 않았던 여성 산악인입니다.
그 사고 이후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안나푸르나=신영철 (소설가, ‘사람과 산’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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