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유게시판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안나푸르나 정상에 꽃을 피우겠습니다


며칠간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그치고 11일부터 안나푸르나엔 햇살이 비치고 있다.
안나푸르나 등정을 앞두고 오은선 원정대의 한 대원이
 폭설에 쓰러진 캠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제1캠프로 향하고 있다.
[안나푸르나=신영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이르는 카라반 길은 멀고, 높고, 깊고 험합니다.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보고입니다.
저는 1993년 에베레스트 등반으로 히말라야와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16년을 걷고 오르는 데 시간을 바쳤는데도 히말라야를 찾을 때마다
힘든 건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황홀한 자연 풍경에 눈은 천국이지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닐기리 산을 에돌아 내려서는
고원 길은 천상화원이었습니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그 많은 꽃들을
히말라야 산록은 어떻게 길러냈을까요.
한없이 이어지는 꽃길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인간세계와의 단절 때문에
더 귀한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형색색의 그 많은 꽃 중 이름을 아는 것은 에델바이스 하나뿐이어서
꽃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도 듭니다.
저마다 색이 다른 꽃들은 그 다양한 빛깔을 어떻게 구별해
땅속에서 길어올렸을까요.

곁에 한 무더기 에델바이스가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나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산악인의 꽃. 에델바이스는 이곳에선 너무 흔합니다.
아예 꽃밭을 이룰 정도이니까요. 고결, 기품이 그 꽃말이던가요.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들어섰습니다.
 마지막 시험이라도 하듯 파란색 빙하호가 제 앞을 가로막고 있네요.
얕은 곳을 찾아 바지를 걷고 물길을 건넜습니다. 그 차가움이란….
맨 살에 부대끼는 안나푸르나 빙하가 흘려준 물의 그 진저리 쳐지는 차가움.
발이 떨어져 나갈 고통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론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는 각성이었어요.
사람이 산다는 것도 때로는 그런 차가움을 견뎌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미 틸리초·닐기리 연봉과 안나푸르나 산맥에 둘러싸여
더는 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생명의 땅에서 불모의 땅으로 들어선 것이지요.
길이 끝난 곳에 우리 팀 선발대가 만들어 놓은 베이스캠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베이스캠프는 새로운 길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히말라야 하얀 산들이 막아서서 더는 갈 수 없다는 듯
위압스럽게 막아 선 땅 끝.
이제 그 앞 미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길이 끝난 곳에서 안나푸르나 빙하를 거슬러 오르고,
암벽을 넘고, 빙탑을 돌아 서고,
깊은 크레바스를 피해 정상에 이르는 길.

시도 때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의 굉음이 자주 들립니다.
그 소음은 솔직히 저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안나푸르나는 지금까지 14명의 한국 산악인과
60여 명의 외국 원정대원을 삼킨 무서운 봉우리예요.
생과 사를 가름하는 미지의 길이,
제가 가며 부딪쳐 극복해야 할 저만의 길인 것입니다.
부끄럽게 고백하거니와… 전 많이 웁니다.
딱히 여자이기에 우는 건 아니에요.
그 울음이 두려움 때문인지 외로움인지 저도 모릅니다.
왜 있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저 주르륵 흐르는 눈물.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 완등의 세계 최초 여성 등정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14좌를 완등한 남성 산악인은 꽤 여럿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성은 한 명도 없기에 분에 넘치는
세계 미디어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등반 중 몇 번 조우한 스페인의 에두르네,
이탈리아의 멜로이,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그리고 이젠 고인이 된 한국 산악계의 별 고 고미영씨.
유럽 언론은 우리를 일컬어 소위 다섯 명의 소프라노들이라고 보도했지요.

이제 세계 최초가 되고자 하는 레이스가 종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여성 산악인 경쟁자들 사이에선 단 한 번의 실수로 경쟁에서
탈락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납니다.
고미영씨가 그랬고,
올 여름 K2에서 8200m까지 오른 뒤 ‘보틀넥’이라는 이름의 칼날 능선 구간에서
좌절한 오스트리아 겔린데 칼텐브르너가 그랬습니다.

안나푸르나 신이 받아줘야만 저도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등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폭풍설 때문에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독자 여러분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생긴 것도
안나푸르나 여신의 배려가 아니겠어요.
11일부터는 눈에 묻힌 캠프를 발굴하러 셰르파들과 함께
제1, 2캠프까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더 이상 폭설이 내리지 않고,
정상 부근에 부는 강한 제트 기류가 부드러워지면
바로 등정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카라반 중 보았던 꽃들처럼 제가 가진 체력의 한 방울까지 뽑아 올려
저만의 꽃을 안나푸르나 정상에 피울 것입니다.
여러분 성원에 따뜻한 에너지를 마음속으로 느낍니다.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제가 바라보고 있는 장엄한 안나푸르나의 설경과 신선한 히말라야 공기를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0월 13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오은선


**중앙일보**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