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물도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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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떠난 배가 소매물도 선착장에 접안 할 때 제일먼저 눈에 들었던 글은 선착장 낡은 건물 벽에 씌여 있는 '근면자조 협동'이었다.

그때도 역시 폐쇄되어 있었던, 누런 색 세관감시소 건물의 하얀 페인트로 써진 구호였다.
1992년 8월 나는 낙동정맥 종주를 금정산에서 끝냈었다. 일년 여 낙동정맥에서 사계를 보내며 참 행복했었다. 대학교 산악부원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 종주기를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하고 있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까지 정맥은 연장되고 있었으나 서둘러 끝낸 이유는, 그때까지 금단의 땅이라 불리었던 티벳 초오유봉과 시샤팡마봉 등반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금정산 정상에는 종주를 축하하기 위하여 경향 각지에서 모인 많은 산 도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에서 본 낙동강은 침묵한 채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고 그 대하를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흥에 진저리를 쳤었다. 대하를 이룬 낙동강을 일 년여 따라 온 탓이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동해 바다와 낙동강을 가르는 산줄기를 타고 온 것이었다.

대 장정의 산행이 끝나는 그날, 송도 횟집으로 또는 맥주 집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퍼마시다 대취를 했다. 취중에 마침 해벽 취재를 온 팀의 꼬드김에 그 길로 소 매물도로 옮겨갔었다.

지금은 통영이지만 그때는 충무로 불렸었다.
거기서 배를 전세 내어 도착한 소매물도의 첫인상 역시 '근면 자조 협동'이었다.
민박집으로 결정한 곳은 소매물도 포구가 눈 아래 내려다 보이는 이 마을의 이장 김충곤씨의 집이었다. 나는 그때 김씨의 눈이 바다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민박과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답게 선한 눈이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는 어쩌다 찾는 변방이 소매물도였고 십여 가구만사는 조그마한 섬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해벽 등반이 끝나고 고즈넉한 섬에 어둠이 덮히면 당연히 그 집에선 술파티가 벌어지곤 했다. 그때만 되면 김충곤씨는 신이 들린 듯 장구를 쳐댔다. 가만히 들어 보니 흔한 장구 솜씨가 아니었다.

중모리 중중모리 엇박자에 자진모리는 물론 디스코 리듬에 재즈 리듬까지, 장구는 그의 신경이 연결 된 듯 온몸을 김씨의 의식대로 떨며 울렸다. 장구 하나에 이렇게 많은 리듬이 있는 걸 처음 알았듯 예사스럽지 않은 솜씨였고 감각이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흥을 불러내는가 하면 바닷 속에 갈아 앉은 듯 막막한 진양조 리듬도 있었다. 장구소리에 몰입한 김씨의 눈엔 정말 바다가 둥둥 떠 있었다. 우리는 그의 마당에서 술에 취해 덩실덩실 춤추었고 김씨의 장구 소리는 밤바다로 둥글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침이면 그는 자기의 통통 배에 우리를 태우고 섬 뒤편에 홀로 우뚝한 촛대 바위에 데려다 주었다. 해풍에 씻기어 하얗게 바랜 촛대 바위는 난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서있었고 우리는 거기를 기어오르는 퍼포먼스 클라이밍을했다.

그렇게 3일 밤낮을, 소 매물도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바다와 바위만 보면서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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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년 만에 다시 찾은 소 매물도는, 근면 자조 협동의 글씨가 그대로이듯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있었다.
가파른 마을 뒤편 넘어 등대섬을 가는 언덕에는 '매물도 초등학교 소매물도 분교'가 있었는데 후박나무 숲에 에워 쌓인 그림 같은 풍경 속 학교였다.
그때는 6명의 학생과 선생 한 명이 있었으나 이젠 폐교가 되어있었다.
이름도 '힐 하우스'라는 찻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이승복' 반공 어린이 동상은 그럼에도 홀로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어디선가 뻐구기가 울었다.
맑은 태양 아래 바다를 향 해 졸듯 앉아 있었던 분교는 총 131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때, 깨끗하게 빗질 된 이 분교 운동장 후박나무 그늘에 앉아, 이런 학교 선생이 되어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힐하우스라는 민박 겸 찻집으로 바뀐 분교는 학교를 이을 아이들이 생산되지 않은 증거였고 대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었다.
갈 사람 죄다 가고 바다를 향해 설장구를 치는 김씨 같은 사람만 이 섬에 남았다. 김씨는 평생 바다에서 사는 법만 배웠으니 도시는 상상으로도 무섭다고 했었다.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올라보면 이 섬이얼마나 적은 섬인가를 금방 안다. 뜻 그대로 다도해가 사방 거칠 것 없이 질펀하게 보였다.
어느 다리 긴 거인이 있다면 곳곳에 솟은 섬만 밟고도, 물 안 묻이고 다도해를 한바퀴 돌 수 있겠다.
해풍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고 투명한 바다는, 시선 끝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하얀 등대를 고깔처럼 이고 있는 등대 섬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소매물도와 등대 섬은 무릎까지 빠지는 좁은 수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 온 후 김씨 배를 타고 등대섬으로 갔다. 섬을 반 바퀴 도는 과정에서 예전에 올랐던 송곳 바위가 반가웠다. 모름지기 소매물도를 찾는 사람들은 꼭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내밀하게 숨어 있는 해벽을 보아야 한다.

우람하게 솟구친 해벽에는 무수한 동굴들이 있다. 큰 곳은 배가 들어가기도 하거니와 그 벽면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문양과 색감은 말 그대로 작품이었다.
아치처럼 뚫어진 동굴도 있었고 칼로 잘라 놓은 듯한 틈도 보였다.
  
운이 좋아 등대 끝까지 오를 수 있었다. 등대 속의 철 계단은 몹시 부식되어 있었다. 나선형 계단 끝 사다리를 타고 오르니 밤 바다 길라잡이 불빛을 생산하는 서치라이트가 있었다.
등대의 뒤편 역시 아득한 절벽이었다.
한참 섬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다가 부글거리며 끓는 듯 거품이 일었다. 숭어 떼였다. 많기도 해라. 무수한 숭어 떼가 무리 지어 유유자적 봄 바다를 헤치고 있었다.
                  
다시 배를 타고 선착장으로 왔을 때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김씨 어머니를 만났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물질을 하고 있었다. 금방 바다에서 건져 온 전복이며 해삼을 손 큰 동료가 몽탕 사 버렸다.
"아직 김씨는 장구 칩니까?"
"그거말고는 그 사람이 아는 게 뭐 있노. 옆집 사람 부끄럽게 시리 밤마다 쳐 대지. 며느리도 벌써 떠나고 저도 심심할끼라."

*나에게 메일을 보낸이에게 감사를 보낸다.
영어로 썻기에 사전을 찾고 뒤지고 용천을 쓴 끝에 겨우 읽었다.
두 시간 걸렸다.

두 시간도 아까운데 세 시간을 더 허비 할수 없다.
그러므로 영어로 답장을 쓸 수 없음을 요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