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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발디.


비행기가 엘에이 시내 상공을 반원을 그리며 크게 돌았다.

기창밖엔 엘에이 특유의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다. 한국은 매서운 추위와 폭설이었는데 하루  밤사이에 계절을 거슬러 오른 느낌이다. 반듯한 길과 줄지어 달리는 차량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405 프리웨이겠지. 고단한 비행이 드디어 끝난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폈다.

 

45도 정도로 선회를 하는 기창 밖으로 삭막한 암갈색 산들의 늙은 주름처럼 펼쳐진다.

그러다 홀연히 흰 산이 나타났다. 나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눈 덮인 저 산은 산 발디 봉이다. 첫 눈에 그 산을 알아 볼 정도로 나는 그 산을 잘 안다.

미국에서 처음 오른 산이 발디 봉이었다. 그 후, 계절을 바꾸며 무수히 오르내렸다. 눈 고깔을 쓴 발디는, 설선을 경계로 갈색과 하얀색이 뚜렷하게 나뉘었고 지금도 역시 홀로 우뚝했다.

 

이민을 처음 왔을 때, 문화적 충격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산이다.

내 주변 친지들은 누구도 엘에이에 산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 말은 틀렸다. 빅베어라든가 맴모스 같은 휴양지로서 산을 알았지만 두 발로 오르는 산은 몰르고 있었다. 팍팍한 이민 생활에서 등산이라는 노가다를 즐길 여유가 없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산을 알게 해준 것이 우리 재미한인산악회다.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리스는 무늬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산을 찾아다니며 나는 정말 천상의 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산을 찾아 오르며 산행을 통해 의식의 지평은 확대되고 더불어 세상 보기가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발디는 자연적인 숲이 있었고, 시냇물이 흘렀고, 눈이 있었고, 아득한 산정에서는 가뭇한 바다가 보였다.

 

엘에이에 무슨 산이 있어? 하고 묻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빙긋 웃는다.

바보처럼 곁에 두고도 멀리서 건강을, 마음의 여유를, 자연과 대화를, 살만한 세상이라는 걸 찾는 것 같아 그렇다산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보면 누구나 자신의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혹은 사람과 산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산은 홀로 오를 수 없다. 발디가 미 대륙 최고봉 휘트니로 이어지고, 더 지평을 넓혀 히말라야로 이어지듯 지구별에 산은 많다. 누구나 뜻이 있다면 그걸 가능케 해주는 엘에이의 산이다. 물론 그런 고산을 가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산은 홀로 오르는 게 아니라고 경험이 가르쳐 준다는 말이다. 산행이라는 건 경험이 필수다. 이것은 여행이건, 삶이건, 사람 사는 방법론에서 변치 않는 수칙이 된다.

 

전통 있는 우리 산악회를 만난 건 나에겐 행운이고 즐거움이며,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건 참 고마운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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