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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환상방황(環狀彷徨)의 그늘은 2002년 2월 미주 한국일보 신춘 문예 소설에 당선된 재미한인 산악회 회원인 나마스테(신영철 회원)의

산악소설 입니다.


환상방황(環狀彷徨)의 그늘
                                                            

                                                                신 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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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그래왔듯 선영은 오전 7시 30분 산타모니카 집을 나섰다. 도로는 출근을 서두르는 차량으로 몹시 붐비고 있었다. 선영은 프리웨이로 진입하려고 꼬리를 문 차량 행렬 뒤에 자신의 차를 붙이며 출근이 늦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국 서해안인 산타모니카에서 시작하는 것이 10번 프리웨이다. 이곳에서 시작해 오천육백 킬로미터 이상을 달려 대륙을 횡단하며 동부에 이른다는 10번 프리웨이. 이 도로 역시 10차선이 넘었으나 차량들로 심한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출근길 아침마다 시원스레 차가 빠지기를 기대하지만 역시 오늘도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영은 이내 포기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차량의 느린 이동 틈에서 조급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공연한 마음 고생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지구별 어느 곳이든 그렇겠지만 4월의 로스앤젤리스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물오른 나무들이 연두 빛 새순들을 틔워내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형형색색의 꽃들도 다투어 피기 시작했다.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특유의 맑고 투명한 햇살이 눈부시게 봄 대지에 쏟아지고 있었다. 여늬 해와는 다르게 길었던 장마는 불과 몇 일 전에야 끝났다. 사막성 기후라는 이곳의 초목들이 늘 청정한 것은 이런 우기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오른 초록 세상을 보며 선영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선영은 에프엠 주파수에 맞춘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멀리 로스앤젤리스 다운타운의 빌딩들이 신기루모양 우뚝했다. 이렇게 보면 다운타운의 빌딩 숲은 마구 지어진 몰개성의 콘크리트 숲이 아니었다. 각 개체마다 독특한 형태로 지어지고 그 다른 특징들이 한데 어울려 근사한 동선을 이루고 있었다. 선영의 직장이 입주해 있는 아메리카은행 타워도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매일 보아 낮이 익은 시가지의 모습이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선영은 문득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 빌딩 숲 하늘 배경의 하얀 구름들이, 구름이 아니라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산맥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놀라웠다. 선영의 상식으로는 로스앤젤리스 근교에 저렇게 높은 산이 없었다. 그런데 하얀 눈을 쓴 산맥이 홀연히 나타나다니. 착시는 아니었다. 분명히 하얀 눈을 인 산맥이었다. 눈 덮인 산에 초점을 맞추니 역광에 네거티브 필름처럼 금새 도시는 회색 빛으로 갈아 앉았다. 상대적으로 다운타운의 빌딩 숲을 에 두른 하얀 준령은 도드라져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과 대지와 경계도 모호한 흰 산줄기는 허공에 둥실 떠올라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0년을 넘게 산 선영... 이런 풍경을 처음이었다.

다른 구릉과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사막의 색감인 갈색으로 산들이 숨어있어 그랬을까.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하던 산맥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지루하게 내렸던 비는 산에선 눈이 되었고 장마 뒤의 청명한 날씨가 가시거리를 높인 덕분에 선영은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그 정경을 보며 선영은 가슴 서늘해졌다. 흰 눈 때문이었다. 투명한 햇살 아래  몽환처럼 밝게 빛나는 산군을 보며 선영은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아픈 기억들이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차량정체는 계속되고 있었고 흰 띠 두른 산줄기는 도로의 정면에서 외면 할 수도 없게  빛나고 있었다.

낡은 흑백사진처럼 각인 된 기억들이 하얀 산줄기에 오버랩 되어 가슴에 차 올랐다. 눈...... 하얀 눈...... 용서. 깨진 사금파리 조각들이 햇빛에 난 반사되듯 그 단어들은 조합되지 않은 채 선영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차가운 대기가 거칠 것 없는 시선을 무한대로 뻗어나가게 하듯 저렇게 하얀 눈이 덮인 겨울 산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꿈을 꾸었었다. 선영도 그 꿈을 좇아 알라스카에 있는 북아메리카 최고봉 매킨리를 간 적이 있었다. 아니, 그 꿈은 선영의 것은 아니었다. 선영을 사랑했던 한 사내가 일생을 걸고 추구했던 꿈이었다. 그러나 꿈은, 적어도 살아 있으므로 상상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꿈은 이미 사라졌다. 죽은 자... 대체 꿈이 무슨 소용일까. 유난히 하얀 산을 사랑했던 남자. 그의 이름은 유재일이었다.

그녀는 유재일과 알라스카 매킨리에서 헤여져 미국에 남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산을 찾지 않았다. 하얀 산은 더 더군다나 싫었다. 로스앤젤리스라는 도시에 정착 한 것도 따듯한 기후에 산도, 하얀 눈도 없다는 사실에 이끌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산이라니…… 그것도 하얀 눈을 쓴 산들이 이렇게 지척에 있었다니…… 선영은 무엇인가에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선영이 낮선 땅 미국에 정착하여 30대 중반이 되도록 혼자 살았던 세월은 저렇게 빛나는 하얀 눈과 운명적으로 닿아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선영은 산을 자주 찾았다. 특히 눈 덮인 겨울 산을. 그렇다고 산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사내, 유재일이 겨울 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재일은 야생마처럼 산 속에서 늘 즐거워했고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 선영은 산에 만족했다. 재일과 동료들은 산악인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일반인들과 전혀 생소한 삶을 사는 그들을 근사치에서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산에 관한 한 집요했다. 어떤 에너지가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이를테면 그 사람들 마음의 저간에는 종교적 믿음으로 산과 자연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일을 통해 만나는 산사람들은 모두 선했다. 평소 과묵하고 말이 없는 사람들도 산행이 끝나고 술자리가 벌어지면 목에 힘줄을 세우며 알피니즘*이니 머메리즘*이니 하며 선영이로 서는 알 수 없는 토론에 열을 올렸다. 예술도 본질적으로 무상의 행위라는 게 맞는다면 이들 역시 그런 감수성으로 산을 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산행 횟수가 거듭 될수록 선영의 눈에도 겨울 산의 아름다움이 다가왔다. 빛깔도 없는 겨울 산 특징인 흑백의 단순한 구도. 북- 그으면 죽- 찟길 것 같은 눈부시게 검푸른 겨울하늘. 그것에 저항이라도 하듯 하얀 설원 위로 홀연히 나타나 버티고 선 빙벽들. 그리고 번들거리며 얼어붙은 설원과 눈 처마. 수만의 얼음 조각 사이를 누비는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 절제되고 생략된 검은 바위와 하얀 눈의 콘트라스트.

유재일이라는 전문산악인이 곁에 있어 가능했겠지만 산행은 언제나 즐겁고 유익했다. 겨울 산의 고혹적인 풍광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무들은 저 마다 흰 갑옷을 입고 망부석 같은 모습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고 나무 사이사이를 빠져나갈 때마다, 크리스털 닮은 고드름이 부딧쳐 맑은 쇳소리를 내었다. 이런 겨울 산 비밀을 알게 해준 재일과의 만남이 선영이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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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와의 첫 만남도 산에서 이루어졌다. 그녀가 한국 K대에 재학 중 일 때 학우들과 설악산으로 친선등산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 안내를 맡아 해준 사람이 바로 유재일이었다. 재일은 군대를 마친 후 복학하여 학교 산악부를 이끌고 있었다. 유난히 키가 크고 말수가 적었던 재일은 설악산 산행 후 서울로 돌아와서 선영... 전화를 걸었고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재일은 스스로를 '산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폄하 하기 위한 단어 '쟁이'를 '산' 뒤에 붙이고, 그는 스스로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재일의 그런 가벼운 표현과는 달리 그...서 산은, 그 깊고 우람한 덩치 이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선영은 잘 알고 있었다.

재일은 입학하자마자 입회한 동아리가 산악부였다고 했다. 졸업후면 흩어지는 대학동아리 문화에서 보수적인 산악부는 졸업 후에도 선.후배의 연대가 돈독한 것이 특징이었다. 사회인이 된 선배들을 초청하여 합동 산행이 있던 어느 날, 야영장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선배들은 재일에 대하여 말했었다. 재일은 그날 늦게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고 후배의 여자인 선영... 선배들의 대화 촛점은 자연스레 모아졌다. 규율이 까탈스럽고 엄격한 선.후배의 질서가 존재하는 산악부에서 재일은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입회하면서 열심히 산을 찾고 배워나갔다고 했다. 당시 같이 학교를 다니던 선배들은 그런 재일...서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산악부 전통을 이을 동량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가 산행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재일에 대하여 별별 소문이 무성했다. 80년대 초, 서울은 최류탄 냄새가 봄날 송홧가루 날리듯 흔했던 세월이었다. 대학교 앞은 늘 시위로 어수선했고 선배들은 산이 아닌 시위현장에서 그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재일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배들은 집회를 찾아 나섰고, 그러면 앞자리에서 연좌 시위를 벌리고 있는 재일을 만났다. 선배들은 매번 그를 끌고 나왔다고 했다. 군인 출신들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고, 혼자 누리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제법 운동권 이론가 같은 논리를 펴는 재일..., 선배들은 엉덩이를 걷어차며 산으로 끌고 갔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일은 체포되었다. 당시 도하 각 신문에 대서특필된 '현대사회문제연대회의' 즉, 약칭 '현사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다는 게 공소 사유였지만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조작 냄새가 짙게 나는 이 시국 사건으로 많은 학우들이 구속되고 도피했는데 체포 된 재일은 다행이 풀려 나왔다.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구명운동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산만 열심히 다닌 그간의 행적이 증명되어서 였다고도 했다.

재일과 함께 풀려난 사람중 박래경이라는 선배도 있었다. 그는 풀려 난 후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 낙향했고 얼마 후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태백공사'라는 위장 간판 뒤에서 일어난 보안대의 폭력과 고문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결과였다.   풀려 난 후 산으로 돌아 온 재일은 더욱 말이 없어졌다. 혼자 감옥에 가지 않았다는 죄의식이 내재되어 그렇다고 동료들은 생각했다. 그러다 서둘러 재일은 입대를 했고 남들 같이 의무 기간 복무를 끝내고 복학을 했다.

재일은 제대후 산악부 활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한 때 빠져들었던 완성되지 않은 스스로의 이념보다 상대적으로 자연에 대한 눈뜸이 더 컷는지 치열하게 산으로 만 몰입했다. 이제는 모두 졸업을 해서 자기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선배들의 바램대로 재일은 산악부의 리더가 되었다고 했다. 선영이 재일을 만난 것이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재일이 도착했고 선배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재일은 그를 따르는 후배들... '장딴지에 알통만 붙이는' 산행을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생각하는 산, 근원으로의 성찰이 따르는 산을 주장했다. 선영은 재일...서 늘 깊은 사색의 산 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그가 산에 몰입하는 만큼 그녀도 서서히 재일... 빠져들었었다.
그녀는 어느 사이 재일의 집에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재일의 부모는 그런 선영이를 그리 탐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고, 소위 재일의 동료 산쟁이 모두... 공평히 적용되는 입장이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일은 외아들이었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미래에 대한 설계보다 틈만 나면 배낭을 꾸려 산으로 내달리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특히 같이 살고 있는 팔순 외할머니는 노골적으로 선영... 적의를 들어냈다. 마치 외손자가 선영 때문에 산에 빠져 든 것으로 생각을 고정시킨 듯, 그렇게 치부하고 있었다.
"저러다 일 겨…… 틀림없이 무슨 일이 나도 날 겨."
서울의 위성도시 일산에 있는 재일의 집은 전원주택이라 마당이 넓었고 장기 산행훈련에 들어 갈 때면 그 정원은 짐 꾸리는 장소로 매번 활용되었다. 동계훈련을 위하여 키 만한 배낭을 꾸려 밖을 나서는 일행 뒤에서 재일의 할머니는 늘 그렇게 혀를 찼다.

선영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산악인도, 산악부원도 아니었으므로 그 훈련대가 쳐 놓은 베이스캠프에서 뒤치다꺼리를 도 맡아했다. 온몸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귀환하는 재일과 훈련 대를 보면서 '대체 산이 무엇이 길래' 이 고생들인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 될 수록 산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없는 추상으로 선영... 전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성애가 잔뜩 낀 텐트밖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났지만 텐트 안은 생각보다 따듯했다. 하산주를 나누며, 재일과 일행은 그들의 꿈인 맥킨리 캐신루트* 원정 이야기로 들떠 올랐다. 누구도 맥킨리 캐신루트를 올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그녀... 설명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 계획은 오래 전에 세워졌고 이들은 그 과정의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당연히 팀의 일원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산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도 모르지만 늘 소나무처럼 푸른 재일의 역동적인 모습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선영은 기뻤다. 이미 재일...서 도망 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질리도록 춥고 하얀 겨울 설악에서, 혹은 한라산을 헤매며 시작된 이들의 사랑은 유별 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산은 늘 새로웠다. 몇 번을 같은 산을 가도 그 느낌은 달랐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새벽과 밤이, 오전과 오후가, 비나 눈이 오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산은 그렇게 거기 서 있었다. 재일은 그런 산에서 젊은 날 누구나 부딧쳐야 하는 인생의 해답을 찾는 것 같았다.

심설을 헤치며 산정에 섰을 때 가뭇하게 이어진 산들을 향해  그는 가끔 '용서'라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선영은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용서를 한다는 것인지 해 달라는 것인지 대상이 무엇이지 몰랐다. 깨끗한 자연에 견주어 인간이면 누구나 티가 없을 수 없듯 그렇게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사변적 말인지도 몰랐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재일이 퇴영적이거나 염세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산에서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흔한 카페나 나이트클럽등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위락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재일이었다.

가끔 그런 곳에 가자고 보채는 선영을 따라 나선 재일은 목석 같이 그저 묵묵히 술잔만 비워내고 있었다. 역시 재일은 산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특히 산이 온통 하얀 겨울 산에 잘 어울린다고 선영은 생각했다. 겨울 산 홀로 선 완강한 빙벽처럼 재일은 어느 사이 선영의 가슴에 뿌리 박고 선 우뚝한 희망이었고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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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둘은 졸업을 했고, 은연중 취업을 종용하는 부모... 재일은 말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동안 꿈꾸었던 북 아메리카 최고봉 6194미터 매킨리 원정을 가겠다고. 그 원정을 끝으로 부모들이 원하는 그런 아들이 되겠노라고. 말이 씨앗이 된다는 속담대로, 마지막…… 그랬다. 재일이 부모를 설득하기 위하여 했던 말대로, 그것은 정말 재일... 마지막 산행이 되었다. 재일의 외할머니가 우려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비극적 현장의 중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핏발 선 눈으로 선영은 재일을 지켜보았다. 세상에는 비극적인 일도 가슴아픈 일도 많지만 그 결과를 느린 그림 보듯 일부러 천천히 본다는 것은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불행은 순식간에 일어나며 그렇게 일어나듯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불행에서 치유 될 수 있으며 시간이 흐른 후 그 아픔은 순치 되어 추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선영이 지켜봐야 했던 그 기억들은 절대로 치유되지 못 할 깊은 생채기로 각인 되어 있었다. 느리게, 그러면서도 숨가쁘게 진행된 처절한 상황 속에서 그때 선영은 무슨 생각을 했었나. 무전기를 타고 들리는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잡음 속에 죽어 가던 재일의 쉰 목소리…… 생과 사를 연극 같이 가름했던 현장에서 그녀... 속삭이듯 했던 재일의 마지막 숨소리.

오랜 시간을 호흡 맞춰 훈련해 온 재일과 재학생 후배 두 명과 함께 선영이 한국을 출발하여 북국의 알래스카 앵커러지에 도착한 것은 한국이 초여름이던 5월 15일이었다. 두 달 여정으로 계획된 원정에서 그들은, 갈증 난 듯 알래스카의 준령 이곳 저곳을 헤매며 산행을 했다. 그들이 최종 목표로 한 매킨리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 언어로 '높은 산'이라는 뜻의 '데날리'라는 이름이었다.

세계 최고봉이 원래 이름 '초모룽마'를 빼앗기고 그 산을 측량했던 영국의 장관 이름 '에베레스트'로 불리듯, 1896년 미 대통령 당선자의 이름 '월리엄 매킨리'이름을 따 창씨 개명을 당한 산이 매킨리라고 했다. 재일은 매킨리에 대하여 또는 그 인근의 지리와 인문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 처음 온 사람답지 않게 야영장을 예약하는 등 빈틈없이 행정 처리도 해 놓았다. 그만큼 그는 매킨리에 온전하게 몰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이 처음 찾은 곳은 매킨리 국립공원이었다. 남한 땅 4분의 1 넓이를 갖은 이 광대한 공원은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아름다운 신천지였다. 여우와 산양과 그로즐리 곰들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가끔 나타났다. 개인은 1주일 이상 야영장 사용을 제한한다는 규칙은 이 팀이 원하던 바였다. 파노라마 산, 팡봉등 공원 내의 고만고만한 산과 바위를 찾아 캠프를 자주 옮겨야 했으므로. 윈더레이크 야영장에서는 구름 위에 떠있는 매킨리의 환상적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킨리가 북쪽의 모습을 보여준 셈인데 주위가 온통 꽃밭이었다.

  알래스카의 봄은 아름답다. 하얀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 숲엔 태초의 고요가 있는 듯 보였다. 하얀 빙하가 걸쳐진 산록에는 맑은 호수가 지천이었다. 노란색 알파인 에이븐즈와 하얀색 디아팬시아가 어울려 천상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날씨도 따듯하였고 햇볕도 투명했다. 그러나 위도가 북쪽인 알래스카답게 일조시간이 엄청 길었다. 백야라는 생소한 환경도 신기했다. 오월 중순에는 낮 시간이 무려 19시간이 넘었고 밤 12시 가까워야 비로소 어스름이 밀려왔다. 그러다 새벽 3시경이면 여명이 밝았다. 이런 익숙하지 않은 백야 현상도 매킨리 등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재일은 믿고 있었다.

미국의 4대 공원중 하나라는 이곳을 뒤지며 이들은 매킨리 등반적응 훈련에 열심이었고 또 그만큼 먹는 것도 열심이었다.  문명이 범접하지 못한 순수한 자연생태계를 발목이 시도록 걷는다는 것은 즐거운 노동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그녀의 즐거움은 더 했다. 설선 위로 등반을 나선 팀원들을 기다리며 그녀는, 그들이 쳐 놓은 베이스캠프 역할의 천막에서 따듯한 음식과 차를 만들었다. 이윽고 강렬한 햇살이 숨을 고를 때면 재일은 후배들과 어김없이 돌아와 왕성한 식욕으로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어치웠다.

오월의 미국은, 아니 알래스카는 정말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짧은 여름을 예비하는 연초록 새순들은 왜 그렇게 예쁘던지. 늦은 저녁을 먹고도 환한 백야 속에 재일과 둘이 초원을 거니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재일은 어디선가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해냈다. 그것을 딴 재일은 마치 중세의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선영... 바치면서 짐짓 말했다.  '너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산을 같이 온건 기쁨이며 우리의 사랑은 저 완강한 만년빙하 같이 영원 할 것이다'고. 언 듯 장난스레 말했지만 선영은 재일의 품에 와락 달려들어 고마움의 눈물을 쏟았다. 하얀 산이. 빙하가, 들꽃이 이들을 축복하듯 웃고있었다.

재일은 곧 잘 '신혼여행'을 당겨 온 것이라고 했고 선영은 그 말에 동의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런 행운을 만들어 준 재일... 진심으로 감사했다. 선영과 재일..., 그 두 달이라는 시간은 말 그대로 허니문, 천국으로의 여행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시작되기 전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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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의 위성 봉들을 찾아 점진 적으로 어려운 등반 과정을 거치며 이들은 훈련을 마무리지었다. 이 팀이 목표로 한 루트는 매킨리에서도 등반이 가장 까다롭다는 캐신 루트* 남벽이었다. 그들은 경비행기로 작은 도시 탈키트나 비행장을 떠나 30여분만에 매킨리 봉의 들머리인 카힐트나 빙하에 도착했다. 빙하를 덮고있는 설원의 천연 비행장에 도착한 것이 그해 6월 28일.

베이스캠프지에는 이미 많은 등반 팀들의 천막이 있었고 한켠엔 레인저 사무실과 창고 등도 보였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여자레인저 크리스티나는 입산서류를 챙기면서 선영... 기분 좋은 친절을 베풀었다. 신고를 마친 후 바닥을 고르고 두 동의 대형 천막을 쳤다. 선 채로 그 안에서 취사와 잠자리까지 마련 할 수 있는 크기였다.

간이 의자도 몇 개 펴 놓았고 가스등도 달았다. 베이스캠프장비 분류와 등반 장비, 식량등 짐 정리와 잠자리까지 손보고 나니 제법 아늑한 모양새가 되었다. 모든 것이 이곳에 머물 선영... 불편함을 감소시키기 위한 재일의 배려로 보였다.
또한 이곳은 9박 10일 일정으로 계획된 팀의 등반 기간 중 연락처 역할을 맡을 곳이었다.   원래 열 이틀에서 보름 정도 걸린다는 이 루트를, 재일은 비박*을 하며 열흘만에 끝낸다고 했다. 그 시간의 단축은 오랫동안 면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장비를 최소한으로 가지고 갈 계획이었다.

이 베이스캠프에서 이틀간 적응과 휴식을 취한 후 재일이가 산으로 떠나면 이제부터 이곳은 선영이가 책임자가 될 터였다. 등반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캐신루트를 통한 매킨리 정상에 섬으로서 솜사탕 같았던 여행과 다이나믹한 등반은 마감될 것이었다. 형형색색 스키어들의 세상인 카힐트나 빙하에서 보는 매킨리와 그 전위 봉들은 과연 높았다. 낮엔 덥다고 느낄 정도의 기온이었지만 역시 밤엔 기온이 급속히 떨어졌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는 준비 된 만큼 쾌적했다. 재일과 그 대원들은 고도를 높이며 혹한 강풍을 견뎌야 하겠지만 베이스캠프는 그곳에 비하면 천국일 터였다.

광막한 설원과 매킨리 캐신루트의 남벽이 코앞에 보였다. 배율 좋은 망원경을 천막 앞에 설치했다. 은빛 설원을 질주하는 스키어와 스노우보드 타는 각국의 사람으로 철을 만난 카힐트나 설원은 만원이었고, 간이 의자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는 소일거리였다. 파란색의 장난감 같은 비행기는 퍽 자주 이곳으로 올라와 사람들을 토해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스키어들이었다. 간혹 등반 팀도 들어왔는데 모두 쉬운 웨스트버트레스를 통한 정상 시도였지 난이도가 앞선 캐신릿지를 찾는 팀은 없었다.

삼각형으로 검게 서 있는 캐신 루트의 남벽은 그 위용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했다. 암벽이 검게 보이는 이유는 가파른 낭떠러지기라 흰 눈이 붙어 있을 수 없는 탓이었다. 거기를 기어올라간다는 건, 그것은 스키어들에겐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행위이며 그렇기에 설원을 누비는 그들과는 무관한 풍경이었다. 매킨리의 캐신루트 암설벽은 신들의 영역 같았다.

  30일. 드디어 재일의 팀이 출발했다. 평소 황소같이 선한 남자들의 눈에 팽팽한 기대와 긴장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선영은 보았다. 걱정스런 그녀의 눈빛을 읽은 재일은, 웃음을 지으며 포옹을 해 왔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선영아. 내 마음 알지?. 얼른 갔다 올게. 그리고 내 생각 많이 하고'라고.
그녀는 카힐트나 빙하를 거슬러 등반 지점으로 올라가는 재일과 일행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후 선영은 망원경을 통하여 가끔씩 재일 팀의 등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배율 좋은 망원경이라 하지만 흐릿한 윤곽으로 만 등반 팀이 보였다. 그의 옷인 붉은 색 방한 옷을 찾아내어 초점을 맞추면 요술처럼 재일은 선영의 눈동자 앞에 살아났다.

그런 재일의 흔적 찾기는 망원경 과 함께 선영의 곁에 또 있었다. 망원경이 소리없는 비디오라면 무전기는 재일의 체온을 감지 할 수 있는 오디오였다. 곧추 선 수직의 캐신 벽과 수평의 땅을 딛고 있는 그녀와 유일한 연결 통로가 무전기였다. 짐을 줄이는 것이 등반 팀...는 무엇 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무전기를 가동시키는 밧데리를 아끼기 위하여 재일은 지정된 시간에 일방적으로 그녀를 호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단하며 명료하게 사무적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사무적인 대화 속에서 재일은 늘 생기 있는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선영은 안심이 되었다.

선영 마치 곁에 있는 듯한 무전기 속의 재일과 오랜 시간 말을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애써 자제해야 했다. 재일이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때맞춘 교신에서 평소 같이 부드럽게 한말이라는 게 고작 '네 따듯한 가슴이 간절해'라는 정도였다. 그 말 역시 선영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배려인 줄 선영은 알았다. 또한 그것은 그늘진 바위에 매달려 비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춥고 위험한지  웅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첫날 그들의 등반은 순조로웠다.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선영이 베이스캠프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매일 일기예보를 듣고 재일... 전해주는 것이었다. 세계의 등반가들이 몰리는 매킨리에는 시시각각 산의 일기예보를 정확하게 예보하고 있었다. 모든 등반의 성공 여부는 날씨였다. 기실 개인의 능력 위에 있는 자연이 받아 줄 때 인간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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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도 등반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오후에 그렇게 좋던 날씨가 나빠 질 거라는 예보를 라디오는 전했다. 레인저 크리스티나도 그 예보가 걱정스러운 듯 선영...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런 상황을 저녁 교신 시간을 통해 전해 준 선 영..., 재일은 말했다.
"많이 나빠진다던? 걱정이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기술상 어려운 곳을 넘어섰어. 만천오백피트의 육십 도가 넘는 빙벽을 통과했어. 이제 내려가는 것 보다 올라가는 것이 덜 위험 해.  만약 문제가 있다면 내려 갈 때는 웨스트버트레스의 쉬운 곳으로 하산 할거야. 컨디션도 모두 좋은 편이야. 등반은 차질 없이 진행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기예보 잘 듣고 다음 교신시간에 알려줘. 이상 교신을 마친다."

선영은 자신에 찬 재일의 목소리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셋쨋날 아침의 일기예보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폭풍이 매킨리 쪽으로 밀려오고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교신 시간에 전해온 재일의 말로는 산 위쪽으로는 너무 청명한 날씨라는 것이었다. 선영은 일기예보가 빗나가기를 빌었다. 사실 그런 빗나간 일기예보를 얼마나 많이 접하였던가. 그리고 재일의 말대로 철수가 등반 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니까 이 팀은 계속 오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또 고도를 높일수록 땅과의 기압과 기상은 다를 수 있으니까 일기예보가 틀릴 확률은 더 높았다. 선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자위했다.

등반 넷째 날이 되었다. 밤낮이 애매한 천막 안에서 졸고 있던 선영이 화들짝 놀래어 천막을 나섰다. 하늘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옅은 새털구름만 무심한 듯 떠 있었고 태양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오전 통화에서 폭풍에 대한 일기예보를 들은 재일이, 저녁 교신 시간에는 이미 만육천사백피트를 통과하는 중이라고 알려왔다. 얼음과 혼합된 어려운 암벽을 몇 번에 나누어 오르고 있는 중이며 이 어려운 구간을 끝내고 다시 비박 할 것이라고 했다. 계획보다 빠른 속도였고 고도를 더 높인 것을 보면 말은 안 했지만 재일은 일기예보 때문에 등반을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그때까지 선영은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날씨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안개가 카힐트나 빙하 하단에서 스멀스멀 밀려오더니 급기야 빙하를 덮고 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소위 북극 지방에서 볼 수 있다는 화이트아웃 현상이었다.

그때였다. 무전기가 다급하게 울린 것은.
"선영아, 당황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빨리 구조요청을 해. 성민이가 추락하는 바람에 모두 같이 맨 줄에 쓸려 우리는 조난 당했어. 얼음 위에 금방 내린 눈이 덮여 성민이 아이젠*이 미끄러진 모양이야."
등반 팀은 이런 힘들고 위험한 등반을 할 때는, 서로 위험에서 구해주기 위하여 자일*을 함께 묶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와는 반대로, 때때로 추락하는 동료의 체중 때문에 함께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 충격적인 상황을 전하는 재일의 차분한 말에도, 선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재일씨, 안 다쳤어? 다른 사람들 상황은 어때?"
"모르겠어. 성민이는 발아래 10미터 정도 떨어져 매달려 있는 데 전혀 반응이 없어. 나는 괜찮은데 기현이는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기현이와 나는 앉을 수 있는 바위틈을 찾아 대피해 있어."
"재일씨, 지금 거기 날씨 상황은 어떤데?"
"아주 안 좋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어. 바람도 거세 지고. 고도계는 이곳의 고도를 1800피트를 가르키고 있어. 구조대... 이 고도를 말하면 우리 위치를 알거야. 성민이가 제발 이상이 없어야 하는 데…… 더 이상 등반은 불가능하니 빨리 구조요청을 해"

자꾸 아득해 지는 정신을 추스르며 선영은 애써 냉정해 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이 그럴 뿐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일방적으로 무전이 끊김과 동시에 선영은 레인저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선영은 크리스티나... 비명 치듯 말했다.
"조난이래요. 크리스티나. 빨리 구조대... 연락 좀 해 주세요."
선영... 자초지종을 들은 크리스티나는 황급히 무전기를 집어 앵커러지의 구조대 본부를 호출했다. 등반 팀은 의무적으로 구난 보험에 들게 되어 있었고, 이곳의 가이드들은 아주 헌신적인 전문가들로 팀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전화를 들고 황망하게 상황설명을 하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보며 선영은 눈물이 자꾸 나왔다. 한참동안 통화를 하던 크리스티나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선영이, 신고는 접수되었고 최선을 다해 구조에 나서겠다는 대답을 들었어. 그러나 점차 어두워지고 폭풍이 불어 당장 나설 수는 없다고 해. 다행이 내일은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보니 아침을 기다려야 해. 팀원 모두 능력 있는 산악인이니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위로와는 달리 날씨는 점점 더 나빠지고 눈은 온 세상을 뒤덮을 기세의 폭풍 설로 바뀌어 갔다. 목이 타는 걱정에 몇 번이고 무전기에 손이 갔지만, 재일이 그녀를 불러주기 전에 통화는 불가능했다. 레인저 사무실 안에는 난방이 되어 따듯했고 크리스티나는 선영을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었으나 선영은 밖으로 나왔다. 혹시 재일이 자신을 찾는 무전 신호를 놓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무전기의 감도는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만에 하나 건물 벽 때문에 통신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혹한 속에 폭풍 설에 갇혀 사투를 벌리고 있는 재일과 동료를 생각해서라도 베이스캠프를 지켜야 했다. 사무실 조명에 비치는 눈보라가 하얗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천막으로 돌아와 무전기를 가슴에 품고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녀가 목이 타듯 그렇게 고대하던 무전기가 드디어 울렸다.

"선영이…… 선영아, 무전 감 잡았어?"
"응, 재일씨. 잘 들려요. 조난 신고는 크리스티나가 해 줬고 내일 아침부터 구조에 나서겠데요. 지금 상황은 어때요? 다른 대원들은?"
"신고가 되었구나. 잘했어. 성민이는 틀린 것 같아. 전혀 반응이 없어. 허리에 맨 안전벨트*를 중심으로 손을 늘어트린 채 뒤집혀 매달려있어. 성민이는…… 끝난 것 같아."
오 하나님……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영은 앉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이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비전문가인 선영의 상식으로도, 성민이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 사람 좋은 성민씨가 죽다니. 형수 형수하며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했던 성민씨가 죽다니. 또 하나의 대원인 기현이는 다리가 부러져 있고, 기온은 더 떨어져 사방이 빙판으로 얼어붙는 암벽 위에 눈은 쌓여가고. 선영은 자꾸 목젖이 간질거리며 울음이 복 받혀 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선영은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들...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 순간 울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일의 목소리도 힘이 없어 보였다.

"재일씨. 내일 아침이면 구조가 될 거예요. 어떻게든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틀림없이 구조가 될 거예요. 아무 생각 말고 내가 한말만 믿으세요. 내일은 이 베이스캠프에서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알았죠? 재일씨!"
"알아…… 그런데 너무 춥다. 내 아노락*을 기현이... 입혔거든. 부상당한 기현이가 이 추위에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어. 더 이상 사람을 잃을 순 없어. 이제 더 이상…… 다행이 기현이는 잘 견디고 있어."

선영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아니 미칠 것 같았다. 재일의 방한 옷을 벗어 기현씨... 입히다니, 그것은 정말 무모한 짓이었다. 구조가 되어 생명을 구하더라도 재일..., 이제 동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재일... 듣던 동상 걸린 등반가의 흉칙한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히말라야 등반 중 동산을 입은 어느 대원은 열 손가락 발가락 거기에 코까지, 튀어나온 것은 모두 잘랐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살아만 준다면, 이 밤을 견뎌만 준다면. 아무리 산악인들끼리 우정이 돈독하다 하더래도 재일은 자신의 옷을 벗는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했을까.

등반 가들은 무게와 부피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클라이밍에 유리하며 빠른 속도로 전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명적 부상을 입은 사람... 옷을 벗어 준 재일... 여분의 옷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통화할게."
마음속으로는 '안돼요'라고 외쳤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욕심이 재일... 도움이 될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기다릴게요. 재일씨와 기현씨는 내가 틀림없이 구해 낼 거예요. 정말 이예요. 무전  기다리고 있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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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추위와, 그 보다 더 큰 정신적 충격에 선영의 몸은 오래 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은 목구멍 안으로만 잠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백야로 아직 사위는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선영을 찾는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텐트 문을 밀치며 덩치가 큰 서양인이 그녀와 함께 눈을 뒤집어쓰고 들어섰다. 그는 데날리 구조대 가이드인 캐빈이라고 스스로 소개를 했다.

캐빈은, 사건 시간과 경위, 현재 등반 팀이 머물고 있는 고도. 처한 상황과 재일 팀이 지참한 장비목록을 묻고 무전기 주파수도 물었다. 그리고 거듭하여 재일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재일은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캐빈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미리 약속한 방법. 즉 등반 팀의 호출에 의하여만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이곳에서의 상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확실하게 알았다고 했다. 노련한 구조대원답게 매킨리의 각 루트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캐빈은 선영... 성민의 상황을 듣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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