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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에게.

나는 어제, 지금까지 오른 산중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랐어.
그 산행 중 힘들어서, 고통스러워서, 참 많이 아파했다. 그 탓에 코가 하루 종일 매웠는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려 한다.

한 달에 한번 보름달만 뜨면 경주 남산을 찾아가는 '늑대산악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임이야.
불법(佛法)에서 늑대란,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구도자로 묘사되어 있지. 남산은 골골 마다 신라인들의 불심이 깃든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야. 셀 수없이 많은 불탑과 불상 그리고 절터가 산재해 있는 곳이지.
마침 중산 김동찬도 한국을 나온 김에, 나는 경주 남산이 주는 그 보름 산행의 후덕한 느낌을 그와 나누고 싶어 경주로 간 거야.

그런데 그날 따라 낮 산행을 한다는 거야.
산행 테마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했고.
그리운 회원 얼굴들을 산행 출발지인 포석정에서 만났는데 그 곁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어.
'희망울타리'라는 정신지체인 시설에서 26명. '성심 새롬터'라는, 성당 수녀님이 보호하고 있는 비행청소년 5명.
정신지체, 자폐아 및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그들과 불량 학생으로 분류 된 그 아이들과 함께 남산을 오른다는 거야.

난 고백하거니와 한번도 자원 봉사 또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동참 한 적이 없어. 그런 미담들을 들을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야. 울산양로원을 운영한다는 스님도 계셨고 대학 선생인 후배 인연 때문에 교환 교수로와 있는 미국인 마이클도 있었지.
그때까지도 산행 주제인 '아름다운 동행'에 대하여 별 감흥이 없었어.
후배인 산악회 회장이 주의를 주었어.
"지금부터 두 명씩 짝을 이루겠습니다. 절대로 손을 놓지 말고 오늘 목적지인 전망대까지 함께 하십시오."

산악회원들과 비행 청소년 한 명에 장애인 한 명이 짝을 이루었어. 돌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지.
출발하려고 하는데 내가 누님으로 호칭하는, 희망 울타리를 운영하고 있는 산악회원이 우리에게 말을 했지.
"우리 친구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나에게도 한 명의 등산 파트너가 정해졌어. 비현실적으로 뚱뚱한 여자였어. 물론 김동찬도 장애인 소녀 한 명과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막상 출발하고 보니 갑자기 코가 매워지기 시작하는 거야.
얼른 선그라스를 꺼내 눈을 가렸어.

알지?
똑 바로 걸을 수도 없는 정신지체아.
몸 따로, 팔 다리 따로 따로 노는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
내 뒤를 따라 오르는 일행을 돌아보면, 아아 거기엔 그야 말로 춤추듯 제 멋대로 걷고 있는 장애인들이 보였지.
어떻게 그걸 설명 해?
모처럼, 아니 평생 처음 산행에 나선 것이 즐거워 저들은 춤을 추는 걸까?
살아 있다고, 나도 사람이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어 저렇게 소리 없는 아우성의 손짓을 하늘에 보내고 있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하나님 내가 무슨 죄가 있나요? 무슨 몹쓸 짓을 했기에 왜  태어날 때부터 이런 천형 같은 장애를 주었나요? 그렇게 몸부림으로 항의를 하고 있는 걸까.

등산로 주변에는 구절초 쑥부쟁이 꽃이 한창이었지.
단풍이 들기 시작한 활엽수들과 누이 얼굴 닮은 박꽃도 있었어. 노랗게 익은 논엔 벌써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있었고.
가을은 풍요로운 시절 뿐 아니라 사람 마음도 넉넉해지는 때는 아닐까?
불량 청소년들은 어떤 잣대로 분류가 된 걸까. 내가 보기엔 정말 아름다운 동해이었는데 사회는 그들에게 '불량'이라는 또 다른 판정을 내리고 있었지.  그들은 그들이 한 눈에 보기에도 자신들 보다 현실적으로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눈빛이었어.
그랬어. 불량 청소년, 아니 소녀들은 내가 보기엔 천사였어. 정신 박약 청소년 손을 꼭 잡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은 가슴 저린 풍경이었지.

한 발 뗄 때마다 발 따로 몸 따로 휘청거리고 눈동자까지 따로 노는 뇌성마비 소녀 한 명에게 물었어.
"좋으니? 가을 산이?"
"우웅"
입술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 소녀는 "응"이라는 간단한 발음 할 수가 없었어. 그럼에도 그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분이 좋다는 걸 표시하려는 안간힘을 보며 나는 자꾸 코가 매워 왔어.

나에게 손목을 잡힌 여자는 비록 비현실적으로 뚱뚱하긴 했지만 사지는 멀쩡했지. 나이는 들어 보였는데 정신연령은 낮았어.
그 장애인 손을 꼭 잡고 내가 제일 앞에 섰어.
일행 모두 내 속도로 맞춰 내 앞으로 못 나서게 했지.
경사가 심한 비포장 길에서 행여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면 안되거든.
나도 그랬고 김동찬도 미국인 교수도 모두 아이들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어. 우리 뒤편엔 찝차가 두 대가 돌발 사태를 대비하여 따라 오고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천년 신라 불심(佛心)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경주 남산은, 윤회처럼 다시 가을이 왔다고 온 몸으로 알려 주고 있었지.
내 파트너를 잡은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어.
물론 춤추듯 걷는 장애인 이마에도 그들과 손을 꼭 잡고 있는 모든 사람들 이마에도 솟은 땀이 가을 햇빛에 반짝였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걷는 게 익숙하지 않을 그들은 힘들어서, 우리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 더 힘들어 땀이 나왔던 거야.

"매미다 매미."
한 철 살다가는 풀 벌래 소리가 등산로 주변에서 많이 들렸지.
"아니야 그건 매미가 아니란다. 쓰르라미야."
"매미예요. 매미."
"정말 그렇네. 매미로구나. 바보 같은 아저씨가 잘 몰랐구나."
  여름을 난 매미가 이미 사라진 가을 산이라는 앎이 뭐 그리 대단해?
"나 매미 쓸 수 있어요."
"오호 그래? 한번 써 봐."
그녀는 자랑스럽게 내 눈앞 허공에 손가락으로 매미를 썻고, 그 천진난만한 행동에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내가 정상인이라서 이들보다 더 즐겁고 생생하게 매미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선명한 매미를. 이 애가 생각하는 상상이 비록 다른 것일지라도 이 아이는 자신의 뚜렸한 매미를 그리고 있었어. 그걸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있겠지만 틀린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하는 이 아이를 어떻해야 할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도 또 나도 소리만 듣고 매미라고 혹은 쓰르라미라고 한 것이지 실체를 본 적이 없어. 만약 어떤 이유로 매미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앎이라는 우위를 내가 고집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라는 이분법 생각은 아주 유치한 일도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익숙하지 않은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산행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 파트너에게 교만을 깨우치는 학습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내 손을 잡힌 채 땀 투성이가 된 이 아이가 사랑스러워졌어.
출발 할 때 들었던 누님의 말이 생각났지. "우리 친구들이 원하는 건 사랑이다"라고 한 말.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사람이니까. 장애인 혹은 비장애의 구분이 있을 뿐이지 우리는 똑 같은 사람 아니겠나.  

모두 힘들게 목적지인 전망대까지 올랐어. 마지막 두 명의 봉사자에게 양쪽을 부축 받은 채 올라온 친구를 보며 이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줬어. 뇌성 마비 때문에 안면에 기뻐하는 표정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난 똑똑히 봤어.
그 소년의 눈빛에서지.
해냈다는 자신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정상에 설 때 느낌은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똑 같은 걸 거야.

전망대에서 여흥을 가졌어.  
놀라움이었고 감동 받았고 또 코가 매워왔어. 흥겨운 합창에 낮 가림이 심하다는 이들의 춤사위는 걸어올라 올 때와 다른 점이 별로 없었지만 신명이 살아 있었지. 장애인과 불량 청소년이라 굴레 씌워진 이들은 함께 수화를 곁 드리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합창했어.
스님도 수녀님도 벙글거리며 기꺼이 이들을 위해 망가져 줬고.

나는 말했지.
"우리 이 다음에는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도록 해요. 약속할게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이 있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라는 말인데,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기도 할거야.
많이 부끄러웠고 많이 생각한 하루였지.
회장에게 한마디 해줬어.
"넌 참 멋진 놈이야. 난 오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른 것 같아."

하산 길이 즐거웠어.
우리는 목소리 모아 끊임없이 동요를 부르며 내려 왔지.
이제 더 이상 걸으며 춤추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고.
저녁 밥 값은 김동찬이 스스로 냈지만 결코 그가 받은 감동에 비하면 많은 금액은 아니야.
'형 저 달 좀 보아."
그들을 배웅하며 바라 본 남산엔 누런 보름달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지.
  • 날라이쥐이나 2005.10.17 20:43
    넘 마음이 따뜻 합니다...
    한국에 있을때 장애인 스키캠프 했던 생각이 나네요...
    선배님...감사합니다...
    맘 따뜻하게 해 주셔서요..^^
  • 김 성진 2005.10.19 16:21
    정말 훌륭하십니다. 따듯하고 감동적입니다.
    모처럼 많은 비가 내린 LA까지 훈훈함이 가득합니다.
    나마스테님, 중산님의 좋은 일에 동참할 때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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