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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마운틴 휘트니에 도착해 즐거운 야영을 하고 있겠다.
착한 그로즐리 곰들이 그들 식량을 나 대신 모두 먹어치웠으면^^.

여기는 안동. 인터넷 강국 답게 컴없는 집 없으니 그곳에서 이 글을 쓴다.
이진아가 왔다는데 먼 곳에 있으니 우짜지? 월요일 가니까 연락 주기 바란다.

........................

"우리 전통의 미는 건축물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연과 합일하려는 정신적 바탕이 그 근본입니다. 주변의 자연을 아우르며 빈 공간 열린 설계로 이것을 만든 거지요."

오월 초록 바람이 싱그러운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오늘 고 건축물 답사 초빙 강사로 참석한 국민대학교 김개천 교수의 말이었다.
만대루 앞을 흐르는 낙동강에는 마주한 병산 숲 물이 녹아들어 온통 초록빛이다.

"왜 이것을 설계한 유성룡은 제일 높은 봉우리를 마주 하지 않고 건물의 축을, 두 번째 봉우리에 맞췄을까요."
그의 설명을 들으며 기대 앉아있던 만대루 기둥에서 슬며시 목을 빼어 앞산을 본다.
몰랐으므로 못 느꼈던 옛 건축의 아름다움이, 그걸 의도적으로 설계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오랜 세월 깊은 잠을 깨고 살아난다.

요즘 유행한다는 연속극 이순신 장군을 발탁해 내고 끝까지 후원을 했던 유성룡이, 450여년 전 이걸 만들 때도 그렇게 흘렀던 낙동강은 지금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그때도 그랬을 까. 병산 오월의 신록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 속으로 푸르게 풀어져 있다.

병산 서원 답사를 하기 전 나는 질펀한 모래밭을 가로질러 낙동강가로 갔다.
먼 빛으로 보았기에 착시는 아닐까 싶어 서였다. 강은 산 그림자를 제대로 담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물 속에 발을 담갔다. 혹 초록 물이 들까 싶어서.

김교수는 건축학 교수보다 미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는 폭넓은 통찰력과 사색으로 우리를 하루종일 한국적 미의 세계로 여행을 이끌었다.
법흥동 칠 층 전탑 아래의 사천왕상 부조에서, 임청각 군자정에서 그의 전문가적 시선은 우리 옛 건축에 대하여 '보는 방법'뿐 아니라, '느끼는 방법'도 일 깨운다.
바쁘게 다리품을 팔면서도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재미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다시 생각한다.

도산서당의 전교당 마룻바닥에 앉아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그의 강의를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전교당에 오르는 길 양쪽 흐드러진 붉은 모란 꽃을 본다. 목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이곳에선 지금이 제철이다.
"전통 건축을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읽기' 위해서는 동양 철학의 이해는 필수"라고 했다. 문득 그의 저서 제목 '명묵의 건축'의 '명묵明默'이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했다.
한문 뜻 그대로 이해하자면 '밝은 침묵'이겠다. 밝은 침묵... 그것은 한낮의 밝음이 아니라 따듯하게 세상을 깨우는 아침햇살 같은 밝음이고 그 적요의 침묵이겠다.

명묵의 건축이란 그런 뜻에서 '빛과 묵언으로 이룩한 건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터였다.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초연한 침묵을 연상시키는 옛 건축물은 이 땅 옛 사람들의 지혜라는 말일 게다.
"있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허虛실實허虛실實의 건축 철학"
도산서원의 한 칸 방과 한 칸 마루를 빗댄, 차고 비고 찬 구조. 그러면서도 문을 열면 무한대로 확장되고 닫으면 고립되는 열고 닫히는 건축 설계자의 철학.

노자의 말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이름지었을 때 그것은 이미 그것이 아니다라는 말,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 불현듯 생각났다.

눈 앞 붉은 모란도 그렇다.
눈 앞 모란에게 '모란아'하고 부르면 이미 그 모란은 모란이 아니라는 말이다.
활짝 피어 도발적 붉은 색 자랑하던 꽃이 짧은 한철 보내고 어느 꽃은 낙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인식한 모란은 실상이 아닐 수도 있다. 순간순간 죽어 가는 모란의 본질은 이미 변하고 있는 거니까.

까마득한 예전 신라시대 선덕여왕이 그림으로 보내 온 중국의 모란 꽃을 보고, 벌 나비가 없다 해서 향기가 없는 꽃이라 말을 했다는 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모란과 그 긴 시간 시공을 초월하여 내 눈앞에 존재하는 모란은, 또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허虛실實허虛실實 이다. 차고 비고 또 차고 그렇게 비운다.

나는 '명묵의 건축'을 읽지 않은 인간하고는 당분간 말을 안 할 작정이다.  

  • 명산이 2005.05.14 05:44
    하하---- 곰이 식량을 다 먹어치우면 속이 씨원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리 신나게 놀믄서 고생하러 간 사람 음해를 하셔야 되겠습니까.
    그래고 곰아--- 식량을 묵어라...는 압권 입니다.
  • 중산 2005.05.16 05:39
    애석하게도 곰은 오지 않았습니다.^^ 휘트니의 설산을 다니다 한국의 서원과 아직은 신록의 연한 빛을 벗어나지 못한 산. 그리고 발을 담그고 있는 형의 사진을 보니 신선이 따로 없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PCT 기사는 형이 쓴 PCT 개관이 압권이었습니다. 역시 아는 것 만큼 본다는 유흥준씨 말마따나 산에 대해서도 많이 아는 사람이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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