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유게시판

조회 수 101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수정 삭제
나...도 어머님이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반문이 있나. 말도 안되는 질문을 스스로... 하며, 바삐 달려온 인천 공항엔 나를 감싼 우울처럼 낮은 구름 속에 운무가 가득하다.
사람..., 아니 전지전능하다는 신...도 어머님이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든 건 방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난 급히 미국을 가는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하고 가는 것이 좋을듯 싶다.
어머니날, 아니 이제는 어버이 날이라고 바뀌었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어머니날'이라는 것이 더 친근하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걸 오늘 오후 국립극장에서 알았다. 해오름 극장에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 상 시상장에 참석하며 안 것이다.

정일근시인의 어머님 안숙자 여사가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로 결정 되었다는 것은 내 개인적 인연으로 볼 때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정시인의 시에세 자주 발견 할 수 았었던 오래전 홀로 되신 어머님. 사무친 어려움 속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자식 키우신 고통 따위는 이야기 하지 말자.

치매 걸리신 할머니가 천수를 누리시고 손자 정시인 집에서 하늘로 돌아 가셨을 때, 정시인은 부산 백병원에서 머리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하나 뿐인 외 아들이 머리를 열고 누운 상황에서의 어머님 마음자리를 말해서 무엇하랴. 그 고통은 내가 안다. 발병과 입원까지 숨가쁜 현장에 내가 있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시어머님의 초상은 또 다른 큰 일이었고, 나는 그때 그 상황을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솔직히 초상이야 호상이므로 넘어 갈 수 있었지만 우리..., 정시인의 수술 결과가 더 큰 일이었다.
아직은 거둬 갈 때가 아니라고, 조금 더 우리 곁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무엇인가에 절실하게 매달린 기억이다. 하물며 어머님, 당신의 백척간두 심사야 말해 무엇할까.

그런 어머님이 '장한 상을 받는다'는데 축하드려야 했다. 마침 내가 출국하는 날이었으므로 자연스레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식장에서 인사를 드리고 행사중에 빠저 나오면 비행기 스케줄에 맞출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락가락하는 빗 줄기를 뚫고 행사장을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랑스런 어머님 손'을 먼저 잡아 보는 일이었다. 장한 어머님이 반갑게 맞는다.
"정시인이 효도 하는 걸 처음 봅니다"
예술 한다는 인간 치고 별종 아닌자 없듯, 한 인간의 성공 뒤에는, 당연히 어머님이라는 큰 얼굴이 있게 마련 아닌가.
"장한 손 한번 잡아 봅니다."
그 장면을 사진 찍어 달라고 했다.

키피숍에는 박재동씨도 있었다. 울산대학교에서 근무하는 박수동씨가 그의 친 동생이다. 사람들은 그를 만화가라고 부르나, 그말 보다는 시사평론가 혹은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인이 더 어룰리는 사람이다. 박재동씨와 그의 장한 어머님과도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보니 정시인을 만난 일도 퍽 오래 되었다. '소월 문학상' 수상은 그저 혼자 기쁜 일로 치부하고 일부러 만날 일이 없었다. 큰 상 수상에 많은 지인들이 축하를 할 것이고, 그 틈에 들리든 말든 돈 안드는 박수 한번 오지게 쳐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상'이 갖고 있는 의미는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들었다. 직접 축하를 하고 싶었다. 정확히 그 고마운 상의 의미를 이해 하지 않았을 어머님, 아니 나의 어머님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어머님... 보내고 싶은 불효자의 심사였다.

                     2

시상식장에는 대형 걸개 그림이 붙어 있었다. 아래 한글로 쓴 사모곡思母曲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고려가요 사모곡은 '호미와 낫은, 같이 칼날이 있지만, 낫의 어머님 사랑이 호미 아버님 사랑을 능가한다'
는, 그런 내용으로 기억 된다.

수상식에 적절한 걸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가 시작되었다. 국림합창단이 합창을 한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 들어도 짠한 정서를 불러 이르키는 '어머님 은혜'였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다운 하머니에 코끗이 매워 왔다.

사회자는 김범수 아나운서였는데, 식이 시작되자 이창동 문광부 장관을 호명한다.
으례 당상관이 좌정을 한 그런 식징의 형식 파괴를 보았다. 역시 이창동씨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관 취임식에 참석한 이창동장관이 정장을 했다. 어머님, 즉 어른 앞이라 그런가 보았다.
일반석에 있다가 단상에 오르는 모양새가 내 눈에는 파격으로 보였다.

하긴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을까. 관료들의 틀에 박힌 처세가 아닌 눈 높이의 장관의 행동이 고마웠다. 이런 일로야, 믿보인 언론이 투덜 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창동 장관의 어머님에 대한 회고 역시 덕담으로는 퍽 인상적이었다.

김범수 아나운서의 맨트 중 첫번째로 정시인의 어머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언제가 가장 슬펐습니까"
"중핵굔가 그때 한 대 때린 적이 있었는데 정시인이 '아버지!'하며 울 때 가슴이 찟어지는... "
세상의 모든 어머님이 그러하듯 목이 메여 말이 토막토막 끊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김범수씨는 상황 파악이 안된듯 했다.

정시인... 마이크를 돌렸다.
"왜 보통 사람처럼 어머니 하구 울어야지 어버님하고 우셨습니까?"
"일찍 돌아 가셨거든요."
그제서야 상황을 안듯, 김씨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님 눈물을 닥아 주라고 맨트를 한다.
영광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그 눈물 닥아주는 정일근. 그 장면에서 참을래도 따라서 눈물이 나왔다.

우리... 어머니란 어떤 존재인가? 언제나 가족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신보다 다른 가족을 위해서 스스로 변방에 머물렀던 사람들 아닌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어머니의 보편적인 형상일 것이다.

정시인의 뇌 종양 수술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그 발병 원인을 묻는 아나운서... '욕심이 많아 그랬습니다'라고, 정시인은 선문답 비슷하게 대꾸를 한다.
그 말에 '바른 말 하는구나'라고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어, 소월문학상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 낭송이 있었다. 하도 그런 자리에 서본 경험이 많은 탓인지 당당하게 할 말 다하고 시를 낭송했다. 그것은 자리를 함께 한 조수미 어머님을 포함하여 모든 장한 어머니... 주는 시였다. 아니 한국의 어머니... 주는 시였을 것이다.
낭송이 끝나자 김범수 아나운서가 추임새를 넣는다.

"방청석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찍어 내느라 정신 없으신것 같다" 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 역시 그랬으므로.

우리는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해드리기보다 언제나 요구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적' 어머니의 이미지는 늘 다른 가족들을 위해 인고하고 희생하는 존재로 각인 되어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 어머님이 내 곁을 떠났을 때 어머니의 빈자리를 실감하게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같이 즐거워하고, 아픈 일이 생겼을 때면 곁에서 지켜봐 주셨던 어머니.

나 스스로 생전의 불효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悔恨)의 감정이 공항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울울처럼, 창밖에 흐르는 빗줄기처럼 나를 감싼 감정이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