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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이 만난 사람,

 

Annual Special 사람과 산·울산 MBC 공동기획 <사람, >

신영철이 만난 사람,

 

국가대표 탐험가 허영호 & 해남 현대판 김정호 천기철

신영철 편집주간 사진천기철 기자

 

본지와 울산 MBC가 연중 공동기획의 첫 발을 내디뎠다. 첫 대상지를 해남 땅끝의 바위 연봉 두륜산으로 잡았다. 땅끝에서 시작하는 것이 첫 방송과 첫 연재에 어울린다는 의견이었다. 땅끝은 육지를 기준으로 했을 때 끝이지만, 바다를 등지고 서면 한반도의 시작이 된다. 그렇게 은 시작의 또 다른 이름. 본지에 새롭게 연재되는 <사람, >은 제목대로 사람과 산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중파 방송은 1주 한 번, 52회 방영된다. <편집자 주>

 

바다로 들어 간 산악인 허영호 대장

 

두륜산 연봉이 만든 땅끝기맥을 종주하다보면 왼쪽으로 언제나 바다가 보일 터. 무수히 떠 있을 다도해 섬들을 연상하는 순간, 허영호 대장이 떠올랐다. 허 대장은 2년 전 그의 경비행기를 몰고 제주도 왕복 비행에 나섰다가 바로 이곳 청산도 앞 바다에 불시착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슬쩍 웃은 적이 있다. 높은 산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그가 익사라도 한다면 이상한 조합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땅끝 봄바람 쐬러 갑시다.”

좋지요. 놀러가는 건 언제나 대 환영. 내가 빠졌던 바다도 다시 볼 겸 무조건 갑니다.”

 

등반이나 탐험이 거창한 게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 외에, 등반이던 탐험이던 광의적으로 보면 놀러가는 것이라는 게 허 대장의 지론이다. 그렇게 놀러가러우리는 고찰 대흥사 들머리에서 만났다. 해남 군청 산악회원들도 합류했다. 대흥사를 관통해 오심재를 거쳐 두륜산군 최고봉 가련봉(703m)을 넘어 달마산-도솔봉을 이어 가는 장거리 산행.

 

봄날 치고는 더웠다. 한바탕 땀을 쏟고 오른 오심재에선 숨어 있던 다도해가 성큼 다가섰다. 우리가 유영하듯 걷고 있는 초록 숲 색깔이 풀어졌는지 연초록 바다에는 말 그대로 섬이 섬섬섬떠있다. 바윗길로 이어진 능선은 남도에도 이런 산이 있었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냈다. 설악산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에 비견된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다. 가뭇하게 이어져 눈에 드는 능선은 온통 바위산이다. 무수한 섬처럼 산도 과연 산산산’.

 

촬영 때문에 자주 쉬니 오히려 힘이 더 드네.”

 

하산 길의 어느 등산객이 다리쉼을 하고 있는 허 대장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배낭과 모자에 사인을 청한다. 그동안 팬들에게 얼마나 해 주었는지 글보다 사인이 달필이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느라 달아 오른 열기에 허 대장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MBC에서 동원한 카메라만 무려 4. 오디오와 작가 등 스텝 수도 열 명을 훌쩍 넘었다. 그 스텝 중, 다리에 쥐도 나고 구토를 하는 사람도 보인다. 산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는 즐거운 등산길이지만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 분명했다.

 

저기 보이네! 저게 청산도요. 내 비행기가 저 섬 앞 바다 속에서 잠수함이 되었네요.”

 

비행기가 잠수함이 되었다는 말이 재미있다. 하지만 청산도가 어딘지 모르겠다. 제주도까지 조망된다는 이 암릉에서 보면 무수한 섬이 깨진 사금파리처럼 빛나고 있었으니까. 어느 섬일까?

 

새삼 허영호 대장의 업적을 나열할 필요를 못 느낄 만큼, 그는 한국 등반과 탐험사에서 독보적 존재다. 그는 늘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한국도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이미 백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허 대장이 1987년에 올라갔던 동계 에베레스트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두 번째 등정자가 없다. 잘 나간다는 한국산악계에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기록이다.

 

1995년 허 대장은 인간으로는 처음으로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을 걸어서 도달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허영호라는 이름 석자는 80년대 후반부터 산악과 탐험계의 아이콘이 되었고 영웅이었지만 어느 순간 산악계에서 그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햇볕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은 법. 햇볕이 옳고 그늘이 틀리다거나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한 것이라면 놀러 온산행에서 떠올릴 화제는 아니다.

 

가련봉을 오르는 암릉은 밧줄을 잡고 기어 올라야했다. 맨 몸인데도 힘들고 위험했다. 몇 번 그런 아슬아슬하고 가파른 암봉을 넘으며 이제 시작인데 저 카메라맨들은 첫 회가 마지막이 될지 몰라, 아마 이 촬영이 끝나면 담당 프로듀서 빼놓고 다 줄행랑 칠거야그런 생각이 들 만큼, 스텝들은 힘들어 한다. 붉어진 얼굴과 땀범벅인 몸이 그걸 말하고 있다.

 

그래도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다. 날카롭게 툭툭 불거진 바위들은 흡사 타오르는 불꽃처럼 온 산을 수놓고 있다. 이름도 거룩한 도솔봉에 이르렀을 때는 서해바다에 붉은 띠를 만들며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치는 텐트가 해풍에 날려 애를 먹인다. 이윽고 바다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고 사람 사는 동네엔 땅별이 켜지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 달도 두둥실 떠올랐는데, 어허! 이건 보통 달이 아니다. 내일이 보름이다. 그러나 매달 오가는 보름달이 아니다. 이번 보름달은 달별이 지구별에 가장 가까워, 가장 크게 보인다는 수퍼문(super moon)이다. 보통 때보다 한아름 더 커진 달, 저렇게 밝은 하늘 등불 걸어 놓고 그냥 잘 수는 없는 일.

 

해남군청 달마산악회 김용하 회장이 텐트 앞에 매트리스를 깔아 막걸리 자리를 만들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갑자기 달마산악회가 위대하게 보였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오가는 화제는 당연히 허영호 대장에게 초점이 몰릴 수밖에.

 

에베레스트를 몇 번 올라갔어요?”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달마의 김옥희 대원이 물었다.

 

네 번. 마지막이 2010년인데 그때는 아들과 함께 올랐어요.”

 

네 번이라니! 한국 최고 기록임에도 허 대장 대답이 시원찮다.

부자가 함께 최고봉을 오른 것도 최초인데 대답에 힘이 없는 이유를 나는 안다. 그 산 정점에 허 대장은 아들과 함께 아내의 사진을 묻었다. 그해 1월에 5년간 투병을 끝으로 자신들 곁을 떠난 아내. 허 대장의 아들 재석이 세상을 떠난 엄마와 함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온 것은 22년 전인 1990년이다. 재석 나이 6살 때. 세계가 좁다고 천형처럼 놀러다니는 역마살이 낀 허 대장 최초의 가족여행이다.

그때 허 대장의 아내는 재석의 여동생을 임신 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잘 아느냐고? 그때 베이스캠프에서 만났으므로 안다. 나는 서둘러 대화를 바꿨다.

 

허 대장, 청산도에서 잠수함으로 바뀐 비행기 값이 얼마요? 아무리 초경량 비행기이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한 일억 조금 넘어요. 두 대중 하나가 바다에 갈아 앉아 다시 한 대 더 사 놓았지요. 내 꿈은 그것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겁니다. 아메리카 대륙까지가 문제인데 하와이를 거치느냐 알류산 열도를 거치느냐 지금 연구 중입니다. 원래 소싯적엔 파일럿이 꿈이었습니다. 가방 끈이 짧아 못했지만. 3극점을 모두 끝낸 1995년엔 우주에 도전하려고 러시아 가가린 센터를 찾아갔던 적도 있었지요.”

 

바다에 추락했을 때 어선이 구조해 준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겁이 나지 않았나요?”

 

허 대장을 만난 것이 영광이라는 김용하 달마산악회 회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선이 아니라 화물선. 방향타가 말을 안 들어 불시착을 결정했을 때 청산도 앞바다에 큰 화물선이 보였어요. 경비행기는 엔진이 꺼져도 한 동안 글라이더 역할을 해요. 바다에 내려도 몇 시간은 떠 있을 수도 있고. 그래 그 곁에 내려앉았지요. 내가 올라가는 데는 선수 아닙니까. 배에서 내려준 로프를 잡고 올라서니 선원들이 기절하듯 놀라더군요. 이미 연락된 경비정을 타고 나는 육지로 배달되었습니다.”

 

허 대장은 모든 모험은 계산된 것이라고 남 말하듯 쉽게 말했다. 계산이라... 계산치고는 무서운 셈법이다. 그 계산이 아귀가 맞지 않아 사라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추락하고 1년 후에 기어이 서울 제주도 왕복에 성공하셨잖아요. 비행기 조종할 때 뭐가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달마산악회 김미향 대원 역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다. 종일 들으니 그 사투리가 정겹다.

 

가장 큰 문제는 소변입니다. 왕복에 8시간 정도 걸리잖아요. 좁은 조종석이지만 우유통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비행기가 가벼운 탓에 요동이 심해 바지에 다 쏟았어요. 그때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지요. , 기저귀 밖에 없구나. 그래서 성공할 때는 기저귀를 세 개 준비해 갔습니다. 물론 그건 쓰지 않았지만.”

 

그걸 사용했는지 하지 안했는지 모르지만 허허, 천하의 허 대장이 기저귀 찬 남자가 되다니. 하긴 조종석을 오줌바다로 만드는 것보다는 옳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대원들 웃음 속에 해남의 수퍼문이 중천으로 떠올랐다. 그때도 해풍은 끊임없이 밀리고 있었다.

 

 

참말로 징허네요 잉~ 천기철(남도산악연구소장)

 

아따 환장빙 하것네. 참말로 무장무장 빙하네. 혼차서 들어 엥길랑깨 허리가 뿔라 질라더마는 여럿이 손을 모퉁깨 워년히 개급그마.”

 

천기철씨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촬영 장비를 차로 옮기다 말고 투덜댄다. 김병주 피디가 나를 보며 무슨 말이냐고 묻는 표정이다. 물론 나도 모른다. 그렇게 해남 사투리는 외국어였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통역이 필요하다는 걸 천씨를 만나며 확실하게 알았다. 앞서 천 작가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환장하겠네. 갈수록 태산이구만. 혼자서 들어 옮기려니까 허리가 무척 아프더니 여럿이 손을 모으니 훨씬 가볍네.”가 정답 되겠다.

 

울산 MBC는 경상도, 해남은 전라도다. 나는 충청도가 고향이다. 촬영 스케쥴을 놓고 천씨가 운영하는 땅끝문화사무실에서 전체회의를 열었다. 천씨는 시종일관 통역이 필요한 전라도 토종어법을 종횡무진 구사했다. 김 피디가 통역을 부탁한다는 표정으로 연실 나를 바라본다. 충청도가 가운데니 양쪽 통역을 하라는 눈치였으나 나라고 별수 있나. 못 알아들으면 당신만 손해고, 내 고향사랑은 사투리에 있다고 천씨는 믿는 모양이다. 남 눈치 볼 이유가 없다고 작정하고 무당파 검객 칼 휘두르듯이 걸판진 말을 쏟아 낸다.

 

그래도 풍성한 체구의 천씨가 밉지 않다. 그 큰 체구에서 구사하는 전라도 사투리가 음악은 아니더라도 운율이 정겹기까지 하다. 천씨는 자신의 넉넉한 풍채처럼 마당발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수성리 72번지 땅끝문화사를 운영하는 동시에 남도산악연구소장, 해남사진가협회 회장, 향토유적위원회 위원, 지명위원회 위원, 남도 지도 제작자, 땅끝 산악회 회장, 목포고 27회 동창회 총무.

 

그런 광폭의 마당발이기에 현대판 김정호라는 영광스러운 평가도 받았다. 해남 땅을 감싸않은 두륜산 일대 등산지도도 직접 만들었고 등산로를 개척했으며 정상 표시석과 안내판을 등짐으로 날라 세웠다.

 

만든 지도가 몇 개고 잘 팔립니까요?”

 

해남의 가게에서는 천씨가 만든 지도가 여전히 1000원에 팔리고 있다. 사투리 세뇌를 받은 탓일까, 질문을 하려니 어째 발음이 이상해진다.

 

한 장에 천원 받는디 잘 안 팔리지라. 월출산, 두륜산, 달마산, 전남 서남부, 남도답사 지도, 보길도까지 맹그렀는디요. 인자는 지도 장사 안 하요. 시방 누가 지도 사봐야 말이제. 인터넷에서 전부 다운받아서 다니는디. 그래서 요즘은 전라남도 맛 지도를 만들어볼라고 돌아다니요.”

 

인터넷이 천씨 지도 장사를 망쳤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것이 아니니까. 땅끝문화 사무실에는 두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나는 천씨가 해남사진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은 땅끝전망대의 여름’. 상패보다도 오백 만원이라는 상금이 더 짭짤했겠다. 다른 한 장은 임권택 감독과 함께 찍은 한창 젊었을 때의 천기철씨.

 

대흥사 입구에 오래된 유선여관알지요? 거기서 임 감독님이 천년학을 찍을 때 만났던 사진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혹시 그 여관 진돗개 노랑이 아십니까?”

 

알다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때문에 유선여관과 노랑이가 유명해졌다. 노랑이는 잡종 진돗개였는데 여관에 숙박한 사람이 두륜산을 오를 때마다 앞장서 정상까지 안내를 해서 유명세를 탄 개다.

 

그 노랑이와 내가 오랜 시간 가이드 경쟁을 했어요.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노랑이와 타협을 했습니다. 노랑이도 상생하는 게 옳다고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개가 앞서면 내가 뒤 따르고, 내가 앞서면 노랑이가 뒤 따라 협조적 산행을 했지요.”

 

천씨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개 같은 사람이라는 유머 때문이다. 개보다 늦게 오르면 개만도 못하고, 개와 같이 오르면 개 같은 사람이라는... 그 말을 들려주자 천씨도 몸을 흔들며 웃었다.

 

천씨는 광주에서 발행하는 무등일보에 3년 동안 남도의 산을 연재하고 있다. 매주 주말판에 한 바닥씩 사진과 함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해남의 갑오징어 먹물 볶은밥등 미각 순례를 한 후 천씨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진 일이 있었다.

 

암울했던 시절 여기서 은둔 생활을 했던 시인 김지하는 이곳에서 <애린>이라는 시를 건졌어요. 시인은 땅끝을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로 묘사했는데 모든 게 풍족한 이 땅을 묘사했다기 보다는 그 시대상을 말한 거겠지요. 우리집 바로 뒷집이 소설가 황석영이 대하소설 <장길산>을 집필한 곳입니다.”

 

천씨 아버님이 중학교 교사로 평생 봉직하며 만든 집은 반듯했다. 천씨의 집은 전국 산악인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천씨는 말 그대로 오리지널 촌놈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예술가적 끼가 넘친다. 그의 구수한 사투리처럼 해남에서 염병하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서울말처럼 욕이 아니다. ‘무탈하게 잘 있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소싯적에 노루처럼 산을 누볐을 날렵한 몸은 맛난 남도 음식 때문인지 살이 많이 불었다. 하여 산행은 방송사 스텝들처럼 힘들어 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처럼 두륜산의 속살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천씨의 해박한 해설은 일품이다. 그의 마당발 덕분에 초의선사가 주석했던 일지암에서 차를 한 잔 얻어먹는 호사도 누렸다.

 

대흥사 말사인 북미륵암에 이르자 눈이 크게 떠졌다. 이렇게 잘 생긴 마애불을 본적이 없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보물이었다가 몇 년 전에 국보 제308호로 지정되었어요. 우리나라의 마애불상 중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조각상입니다. 그런 평가를 받아 국보로 지정된 거지요. 돌을 떡처럼 주무른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솜씨가 바로 이겁니다.”

 

부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이 되지 모르지만 정말 잘 생겼다. 곁의 허영호 대장도 그 말에 동의 한다. 돌을 먹는 떡으로 비유한 천씨를 불러 마애불과 함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왠지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불상과 천씨가 닮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땅끝 전망대를 오르니 바다를 조망하는 창마다 천씨가 검증하여 제작한 다도해 섬 설명문이 붙어있다. 아쉽게도 옅은 해무에 쌓여 제주도는 보이지 않았지만 허영호 대장이 불시착했던 청산도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봄 햇살을 받아 푸르게 일어났던 산맥은 갯벌을 만나고 남해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돌출된 반도 끝머리가 남해와 서해를 나누고 있었다. 눈앞에서 울돌목의 조류가 쏴아~ 소리를 내며 강물처럼 흐른다. 충무공이 이 물때를 파악하여 대승을 거둔 비밀을 단박에 알 것 같다.

 

대 장정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천씨와 이별을 고했다. 천씨의 이별사도 걸쭉했다.

 

사람이 가먼 때죽이라도 냉기는 건디 어찌 이리 허망허니 가뿡가.”

 

반복 학습덕분일까. 이젠 그 말을 알아듣겠다. 사람이 가면 흔적이라도 남기는 것인데,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리는가, 라는 말일 터.

 

천씨 사투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이 주소로 연락하면 된다. http://blog.daum.net/tkt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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