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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산에 신기루처럼 솟아오른 설벽 : 신영철의 세계산책(山冊)-마운틴 볼디(Mt .Baldy)의 겨울

사람과 산님의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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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민대머리 산

 

산이 섬이되는 풍경속 길을 가는 산악인.

서울에 북한산이 있다면, 미국 LA엔 볼디봉(3068m)이 있다. 서울시민에게 사랑받는 북한산처럼, 교민이 제일 많은 LA에서는 볼디가 그 역할을 한다. 서울 시내에서 북한산이 보이듯 겨울이 되면 LA 시내 어느 곳에서라도 흰 눈을 덮어 쓴 볼디 정상을 볼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샌안토니오(San Antonio)지만 대머리, 즉 볼디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높은 고도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해 정상이 대머리처럼 생겨 얻은 별명이다. 거기에 눈까지 쌓였으니 볼디는 사뭇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4일 볼디봉엔 유독 많은 교포산악인들이 모였다. 한 해를 시작하는 산악회 시산제 때문인지, 첫 입산신고를 볼디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한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산이 교민들에게 사랑받는 건 분명했다. 그 중에는 한국산에서 인연이 된 얼굴도 더러 보였다. 나에게도 신년 첫 산행인데 볼디를 함께 오를 팀은 재미한인산악회(회장 백승신)회원들이었다.

가지마다 크리스탈 닮은 얼음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볼디는 국가가 관리하는 국립 산림지역에 속해있어요. 산이 높아야 제 맛이라면 그런 점에서 드라이브 한 시간 정도면 입산이 가능한 산.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3068미터 볼디의 존재감은 우리같은 교민 산악인들에게는 축복입니다.”

이민 7년차가 된다는 이정호씨의 말이었다. 볼디는 눈 풍년이었고 오늘은 설상훈련을 겸하는 등반이 될 터였다. 최근에 [라이프 노 리미츠]라는 산서(山書)를 발간한, 7서밋 기네스기록 보유자 김명준씨도 동계장비로 완전무장을 한 채 나타났다.

신년 첫 산행이었던 볼디에 한인들이 많이 보였다.

“동계 미국 산은 위험합니다. 높고 또 빙판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난 회원들에게 꼭 원정용 12발짜리 아이젠을 착용하라고 권합니다. 실제로 슬립 사고도 일어나곤 하니까요.”

김명준씨의 지적처럼 나 역시 그런 중장비를 챙겨왔다. 장비를 챙긴 후 썬크림을 발랐다. 고도가 높고 설면에서 반사되는 강한 자외선 때문에 미국 산에서 햇빛 차단제는 필수라 했다. 샌 안토니오 폭포를 지나는 자갈길을 따라 1.5Km쯤 오르자 왼쪽으로 등산로가 나타난다. 이곳서부터 실제적인 등산이 시작되는데 그곳에 무인 체크포스트가 보였다. '사람과 산'이란 글을 남기고 송진향 그윽한 숲길을 오르니 온 몸의 세포가 신이 나 활짝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게 미국의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에서 운영하는 초록색 산장(Sierra Club Ski Hut 2600m)입니다. 우린 스키헛으로 부르고 있고요. 예약을 하면 숙박도 가능합니다.”

이정호씨가 가리키는 위쪽 능선에 스키헛이 보였다. 눈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고도를 올리며 산행시작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엽서속 그림처럼 눈에 쌓인 산장에 도착했다. 백두산과 비슷한 고도였다. 산장 앞마당에는 마운틴 스키를 타거나 등반하러 온 미국인들로 북적였다. 볼디 정상에 오르는 산길은 여러 가지다. 등산에 스키리프트를 이용할 수도 있다. 데블즈 백본 트레일(Devil‘s Backbone Trail)을 거치는 코스인데, 연전에 나도 그 길을 이용해 본적이 있다.

“오늘 우리가 오를 코스는 볼디 볼(Baldy Bowl)입니다. 그릇이라는 말이지요. 정상에서 사발처럼 둥글게 쏟아져 내린 저 남벽(South Face)을 직등할 겁니다.”

스키헛에서는 설벽 전체가 보인다. 그곳에서 올려다 본 설벽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무한 확대해 놓은 것 같았고 정상에 가까울수록 상당히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고도차 400여 미터를 극복하는 남벽훈련이 오늘의 하이라이트 등반이 될 것이다. 원래 등산로는 스키헛에서 왼편으로 돌아 능선을 따라 간다. 그 길이 일반적인 코스라고 했다. 회원들 대다수는 그리로 갔고 이정호, 김명준씨를 비롯하여 몇 명은 사발의 왼쪽으로 오르기로 했다.

사막의 산에서 즐긴 설벽

 

힘든 산행 중 늘씬한 파인트리 눈밭에서 휴식중.

동계장비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고글을 꺼내 쓰고 본격적으로 등반에 나섰다. 설벽의 초입은 완만하게 시작했지만 곧 급하게 경사가 솟구쳤다.

“이곳은 산사태 지역인데 눈이 없다면 오르기 힘든 곳이에요.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지는 산사태 지역이니까요. 눈이 있어 가능한 거지요. 이곳 산악인들도 고산 원정을 앞두면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하는 곳입니다.”

그 말대로 고도를 올릴수록 과연 눈풍년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성 기후인 LA근교에 이런 눈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대략 40도 경사를 이루는 설벽은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들이 즐겨 훈련하는 한라산 용진각 경사면을 닮았다. 이렇게 좋은 산을 지근거리에 둔 교포 산악인들이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설면에 박히는 아이젠 소리가 경쾌하다. 아이젠 앞 피크가 설면을 찍을 때 튀어 오르는 얼음가루 사이로 햇살이 반사되며 영롱한 무지개도 생긴다.

정상부에서 만난 자연산 크리스마스트리 소나무.

고도를 올릴수록 점점 경사각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일을 깔 정도로 위험한 경사는 아니었다. 더불어 숨이 차오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하얀 설벽을 개미처럼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인다. 원근 감각이 없어 그런 느낌일 것이다. 호흡이 거칠어 졌다. 낮은 고도가 아니라 그렇겠지만 피켈에 의지하며 가쁜 숨을 고르느라 자주 쉬어야 했다.

숨을 고르다 가랑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스키헛이 현재의 고도감을 실감케 했다. 볼디 볼로 오르는 사람들이 몇 명 없어 덩치 큰 산 임에도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다. 등반을 시작한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드디어 경사각이 죽기 시작했다. 숨이 더 가쁘다.

“이 산에서도 고소증을 앓는 사람이 있고 조난도 당합니다. 종종 그런 일이 있는데, 연전에도 한인 한 명이 볼디에서 길을 잃어 조난사했어요. 우리 재미한인산악회에서 수색 구조 활동에 나선적도 있었고요.”

여름엔 사막의 산이었다가 겨울왕국으로 바뀐 볼디.

3000미터가 넘는 산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마지막 설릉을 올라서 기존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허벅다리가 뻐근한 강행군 끝에 도착한 능선답게 조망이 훌륭했다. 샌 게브리얼 고산준령이 하얀 옷을 입은 채 끝없이 펼쳐져 있다. 군청색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했기에 하얀 산이 더 웅장하고 멋있게 보이고 있다. 등산로 주변엔 수천 년을 버틴 파인트리가 듬성듬성 서있다. 고드름까지 대롱대롱 매달린 옹이진 소나무도 볼디 겨울왕국의 소품이었다. 멀리 민대머리를 꼭 닮은 정상부가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이용하여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이 제각각이다. 추운지도 모르고 반팔에 티셔츠차림의 커플이 보이는가 하면, 배낭 없이 산악마라톤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스노우보드를 들고 온 사람도 있었고 동계야영을 하려는 듯 커다란 배낭과 피켈을 든 사람들도 보였다. 앙증맞은 배낭을 맨 개와 동행한 사람도 보인다. 개성이 넘치는 미국이라더니 과연 산에서도 여러 퍼포먼스를 보인다.

눈덮인 산에서 산악마라톤을 즐기는 커플.

산악행정 선진국 미국

 

오후가 되자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며 산섬을 만들고 있다.

“사실 미국의 산악행정은 배울 점이 많아요. 무엇보다 국가는 국민들의 아웃도어 생활을 유도하며 장려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보이스카웃 운동을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야외생활을 독려하며 유도하는 정책이 강한 미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다리쉼을 하며 설명하는 이정호씨 말대로, 볼디가 국가가 지정한 국립공원처럼 국립산림지역임에도 하이킹, 캠핑, 산악자전거, 산악자동차, 피크닉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귀중한 자원인 공원은 물론 국가삼림 토지도 국민들에게 즐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미국 산악행정의 원칙이라는 것.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나는 그게 부럽다.

제임스 펠로우즈(James Fallows)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미국의 유명 잡지 동경주재원이었다. 그가 쓴 [좀 더 우리답게: 위대한 미국을 위한 제언more like us making america great again]을 보면, 미국이 자랑하는 그랜드캐년 철책이 비유로 나온다. 일본의 호황이 정부의 지휘 아래 기업의 통제경제로 부를 축적했다면서, 미국의 일부가 그런 정책을 따르자는 시각에 대한 반론으로 저술한 책이다. 펠로우즈는 철저한 방임자율을 주장했다. 그랜드캐년에 철책이 없는 것은 자율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의 힘이라는 것. 공원마다 들어가지 말라고 철책으로 혹은 규정으로 통제하는 것보다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판단으로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그런 것 까지 국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20년 일본과, 지금 기지개를 펴고 있는 미국경제를 보면 제임스 펠로우즈의 그 말이 일부는 맞는 듯도 하다.

자율은 강제성보다 더 강한 힘이다. 앞서 말 한대로 우리가 오른 코스 북쪽으로는 마운틴 하이 스키장이 있는 데블즈 백본 트레일이 있다. 이 등산로는 제법 위험한 구간을 품고 있다. 겨울철엔 아이젠과 피켈이 필수 장비가 될 힘들고 위험한 등산로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당국은 막지 않는다. 자율을 강조하는 나라이니까. 한국처럼 백두대간 일부구간이 위험하다고 입산을 통제하는 시각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겨울이 아닌 계절, 체력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리프트를 이용하여 능선에 오른 후 볼디 정상을 오릅니다. 리프트 값은 상행 15불, 하산 12불인데 그 이유는 편도만 이용하는 등산객들 때문이죠. 그래서 노약자나 어린이들도 꿈꾸어 온 정상을 오를 수 있는 거죠.”

산속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자주 바뀐다.

마운틴 하이 스키장 리프트는 2400미터쯤 되는 높이까지 오른다고 했다. 그곳이 ‘노치’라는 곳이다. 레스토랑과 기념품 상가 건물이 있으며 멋진 전망과 멋진 식사 옵션을 제공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리프트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통팔달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원에서 그런 구조물 건설이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세계적인 시에라클럽이라는 환경단체가 존재하는 곳이 미국이다. 당연히 철저한 환경영향평가가 따른다.

전에 소개했던 맘모스 생각이 났다. 존 뮤어(John Muir) 이야기를 좀 하자. 재미한인산악회원들에게 한마디 들었다. 지금은 절판되었으나 나는 [걷는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이란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이 산악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책 때문에 한국은 물론 미국 한인산악인들에게도 종주 열풍이 불었어요. 종주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필독서잖아요. 우리끼리 즐겨야할 보석인데, 갑자기 한인들이 몰려온다고 레인저들이 놀랄 정도랍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끼리 즐겨야’라는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즐겨야 한다. 그게 공익적 가치 아닌가. 세계적인 종합산악관광지 요세미티 근교 맘모스 취재를 한 후, 나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맘모스시 입구에 세워진 간판에 이런 존 뮤어의 경구가 있었다. 산이 부른다(The mountains are calling). 존 뮤어 교도를 자처하는 내 눈에 그 글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았다. ‘산이 부른다’가 아니라, ‘산악인을 부른다’로 읽혔으니까.

그런데 관계자 중 맘모스 시 인터내셔널 디렉터 마이클 발언이 놀라웠다. “맘모스는 이제 겨울보다 여름에 더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겨울 스키 인원은 백만 명쯤이고 여름엔 백이십만 명 정도로 역전되었다.”

이 말은 반전이었다. 인구 8,000명이 거주하는 산골마을 맘모스는 산악관광이 유일한 수입원이다. 산악관광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라지만 한 해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고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다양한 산악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산은 산악인들 만의 것’이 아니라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스키장이 휴업하는 여름에는 낚시, 등산, 마운틴 바이킹, 하이킹, 곤돌라, 승마, 카약과 인공암장에서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짚라인, 번지 트램펄린, 보드와 롤러스케이트까지 맘모스는 산을 즐기는 종합산악관광의 천국으로 바뀐다.

산을 통한 다양한 즐길 거리

 

설벽에 반사되는 햇볕 차단제를 바른 채 등산로를 만났다.

그렇게 산악관광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산이 산악인만 부른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는 깨달음. 물론 산악인들의 산사랑의 순수한 마음은 평가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맘모스 시민을 소수의 산악인들이 먹여 살릴 수는 없다.

“환경영향평가는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까다롭고 투명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환경론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시에라클럽이 미국에 존재한다. 공공의 자산인 자연을 공익적 가치에서 판단하여 산지개발을 결정한다.”

마이클의 말이었는데 그러므로 법률적 완성위에 미국인들은 자연과 사람의 공생을 선택했다. 그 결과가 그때 내 눈에 비친 맘모스 산악레저타운이었다. 맘모스는 환경보전과 개발은 함께 존재하지 못할 앙숙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스위스의 유명한 도시 루체른 필라투스 봉을 오른 적이 있다. 알프스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거대한 바위산 필라투스 봉 역시 아웃도어 활동천국이다. 그런 산에 스위스 처음으로 산악열차와 로프웨이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시발점 크리엔스 역엔 ‘환영한다’는 한국어도 보인다. 역 앞엔 아시아가든이라는 한국 민박집과 식당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들도 이 명산을 많이 찾는다는 말인데, 바쁜 관광에 왕복 9시간이 걸리는 산행을 권할 수는 없는 일.

세계 관광객들 중 이제 큰 손으로 불리는 중국인들이 무지막지 한 줄로 케이블카를 타려 기다리는 걸 보며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필라투스 산의 정상에는 예약이 없으면 방을 못 구하는 호텔 ‘필라투스 쿨름’ 등 두 개의 호텔도 성업 중이었다. 미국의 많은 공원에서 케이블카를 운영한다. 스위스를 비롯 유럽 역시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산에 설치할 케이블카라면 심정적으로 반대부터 하는 국민정서와 당국.

이런 부분이 미국과 한국의 자연에 대한 시각차이다. 한국은 아직 감성적인 부분이 지배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산지개발은 불가능에 가깝다. 관련법이 워낙 복마전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관계당국도 많기에 9군데 허가를 얻어 내어도 1군데라도 반대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 반대를 뚫고 밀양 어름골에 산악케이블카를 만들었다. 그걸 이용하는 사람은 종점에서 200미터쯤 제한된 목재 데크로드를 걷다 도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부근에 있는 재약산이나 사자봉, 가지산 산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정부가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조건 케이블카 왕복을 허가 조건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볼디 예를 보더라도 편도 산행을 막는 이건 코미디 아닌가. 존 뮤어는 프리저베이션(Preservation)을 주창했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간섭 없이 원래 상태를 유지하도록 그대로 보존하자는 것이다. 거기에 대척점이었던 지퍼드 핀초(Gifford Pinchot)의 콘서베이션(Conservation)을 말했다. 자연환경을 보전하되, 인간의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자연자원을 관리한다는 개념이다. 둘 다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래서 존 뮤어를 ‘감상적 자연주의자’ 핀초를 ‘합리적 자연주의자’로 부르고 있다.

미국은 충분한 논의를 거쳐 공익우선이라는 관점에서 핀초 정책을 따르고 있다. 미국뿐이 아니다. 알프스에 무수히 깔아 놓은 케이블카와 산악철도의 유럽도 그렇다. 여러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산을 즐길 수 있는 공익정책을 통하여 자연을 관리하고 있는 미국. 그래서 산을 통한 갖가지 액티비티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 정책 기조도 부럽지만 국가가 나서서 다양한 미국시민들을 자연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 더 부럽다. 반바지 차림으로 능선을 뛰고 있는 커플을 보며 미국산에서 자율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는 듯 했다.

볼디 정상에 서다

 

마운틴 볼 트레일을 따라 하산을 하고 있는 산악인들.

드디어 해발 3068m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돌을 쌓아 만든 캐른과 동판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상에 오른 걸 자축하고 있다.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정상에서의 시선은 거침이 없다.

“굉장하지요? 저 산이 샌 골고니어(San Gorgonio)고, 저쪽이 샌 와신토(San Jacinto) 봉입니다. 언제 저 산도 함께 갑시다. 볼디 보다 높은 샌 와신토도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당일 산행이 가능하니까요.”

이정호씨 손끝을 따라 바라보는 산이 눈에 덮여 은백색으로 빛나며 또렷하게 보였다. 그 봉우리 허리께쯤에서 설선과 녹색이 나뉘는 경계선도 확실히 보인다. 북쪽으로는 암갈색의 광활한 모하브 사막이 있었고 그것뿐일까, 멀리 둥실 떠오른 태평양과 카타리나 섬까지 보인다. 볼디 정상에서 보이는 파노라마 풍경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신년 산행을 함께 한 재미한인산악회원들.

LA에도 산이 있느냐고 묻는 한국 사람들이 퍽 많다. LA근교에 아름다운 산이 많다는 긴 설명에도 한국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사막의 도시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겨울 볼디를 보여주고 싶었다. 더 나아가 북한산, 도봉산이 서울의 오아시스라면 볼디를 포함한 샌게브리얼 산군은 LA를 ‘천사의 도시’로 만드는 배경이라는 것을.

올라 갈 때는 고통스러운 설벽이었으나 내려 갈 때는 고속도로였다. 경사각이 급해 피켈을 잡고 그리세이딩을 시도했다. 처음엔 두려운 마음도 들어 멈칫거렸지만 일단 내리 꼽히기 시작하니 신이 났다. 상당히 긴 설벽이라 한국에서는 즐기지 못한 긴 거리 엉덩이 썰매였다. 올라 올 때 3시간 걸린 거리를 불과 몇 분 만에 내려가 버린 사람도 있었다.

미국 땅 남가주에 거주하는 산악인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축복 받은 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게 부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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