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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 호수에 7가지 아름다움호수에 빠진 시에라산맥

글 신영철, 사진 정임수 시인. 입력 2022.11.28 09:31 수정 2022.12.05 10:13

시에라산맥 3,000m 협곡 산행리틀 레이크 밸리

 

 세 번째 하트호수를 지나며 수영을 하는 미국 청년 둘을 만났다. 미국 청년 아니랄까봐 수영복도 성조기 문양이다.

세 번째 하트호수를 지나며 수영을 하는 미국 청년 둘을 만났다. 미국 청년 아니랄까봐 수영복도 성조기 문양이다.

 

백두대간 지형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이듯 시에라네바다산맥 역시 그러하다. 오늘 갈 곳은 리틀 레이크 밸리Little Lakes Valley. 작은 호수들이 겹쳐 있는 계곡인데, 코 큰 미국답게 작은 호수라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계곡은 빙하가 만들어 놓은 협곡이다. 거대한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동쪽, 가파른 이스턴 시에라는 빙하협곡과 빙하호가 무수하게 많다. 그 놀라운 풍경을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요세미티국립공원도 역시 이 동네에 있다는 것. 빙하가 파 놓은 계곡마다 맑은 호수와 야생화로 가득 차 장관을 이루는 이스턴 시에라.

 

산행 들머리로 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소나기는 미국 서부에서 드문 편인데, 운이 좋았는지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산행 들머리로 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소나기는 미국 서부에서 드문 편인데, 운이 좋았는지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의 모간고개Morgan Pass와 젬호수Gem Lakes를 오르기로 했다. 소문대로 환상적 풍경인지 확인하러 먼 길을 달려왔다. 계곡 입구 프랜치 캠프장에서 23일 여정을 시작했다. 리틀 레이크 밸리 들머리 산행 시작점은 유명한 곳이다. 차를 주차시킬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입구Mosquito Flat trailhead가 바로 그곳. 주차장이 무려 3,139m의 높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거미줄처럼 무수한 시에라산맥 등산로 중 들머리가 가장 높다. 시작이 3,000m가 넘으니 전체 산행 역시 그 이상의 고도를 오르게 될 터.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공간이 딱 한 자리 남아 있다. 일찍 캠프장을 출발한 덕분이다. 뒤를 따라 온 차량들이 하릴없이 돌아 서는 걸 보니 공연히 미안한 마음도 든다.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입구Mosquito Flat trailhead의 주차장은 무려 해발 3,139m 높이에 있다. 해발 3,000m대까지 차로 고도를 쉽게 올릴 수 있다.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입구Mosquito Flat trailhead의 주차장은 무려 해발 3,139m 높이에 있다. 해발 3,000m대까지 차로 고도를 쉽게 올릴 수 있다.

 

오늘 왕복 거리는 비교적 짧은 17km. 설악산 소공원에서 대청을 오른 후 오색으로 하산하는 거리쯤 된다. 평소보다 좀 약한 산행이지만 고소가 변수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산행에 나섰다.

 

문득 여태 내가 걸어 온 산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사람이 평생 동안 걷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개인마다 보폭과 걷는 차이가 있겠지만 단순하게 계산한 사람들이 있다. 우선 80세까지 산다는 가정을 했다. 그들의 통계에 의하면 평생 약 8~12km를 걷는다고 했다.

 

지구에 둘레길이 있다면 길이가 대략 4km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지구를 몇 바퀴 걸어 돈다는 것. 그러나 이 통계는 일반적인 것이다. 평생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도 해당될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 눈앞의 산도 헉헉대며 오르는 주제에 감히 지구 종주를 꿈꾸다니.

 

트레일 입구의 안내판. 여기서부터 트레킹 허가증이 필요하며 광야가 시작된다고 알리고 있다.

트레일 입구의 안내판. 여기서부터 트레킹 허가증이 필요하며 광야가 시작된다고 알리고 있다.

 

고소증과 고산호수 탐방

 

계곡의 청정한 물살이 요란하다.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헤드 이름처럼 겁먹을 모기가 없어 고맙다. 모기도 고소에 약해 없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가벼운 고소증을 느낀다. 당연한 일. 걸어 오르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차나 비행기를 타고 오를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고소적응 때문. 그래서 히말라야나 고산 등반에서는 캠프를 오가는 고소적응이 필요한 것이다.

 

백두산을 훌쩍 뛰어 넘은 고도를 차를 타고 단숨에 올랐으니 힘들 만하다. 숨이 차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렇지만 못 견딜 높이는 아니니 곧 적응될 터. 열린 계곡 너머 수목한계선을 넘은 고산 봉우리에는 여름임에도 눈이 남아 있다. 도브봉, 어보트봉, 밀스봉 등 장엄한 4,300m 이상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풍경에 심장이 더 벌렁대는 느낌이다.

 

이 계곡 역시 이스턴 시에라 광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존 뮤어 트레일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산행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51일부터 111일까지 이곳의 입산 할당량은 하루 25. 그러니 허가 받기가 어렵다. 물론 당일 산행엔 제한이 없다. 입산허가를 받았다면 그림 같은 호숫가에서 잘 수 있었을 것이다. 못 받았기에 산 들머리 야영장을 이용한 것이다.

 

계곡에는 송어가 많이 살고 있어 산행이 아닌 낚시를 하는 사람도 많다.

계곡에는 송어가 많이 살고 있어 산행이 아닌 낚시를 하는 사람도 많다.

 

서로 천천히라는 말이 핑계처럼 나온다. 숨이 차서 빨리 걸을 수도 없다. 한동안 물길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온통 가을 꽃밭이다. 고지대에 올라야 볼 수 있는 고산 야생화가 만발했다. 2km쯤 오르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언덕에서 맥 레이크Mac Lake를 만났다. 우리가 오늘 만나야 할 7개의 호수 중 첫 번째.

 

호수로 유입되는 계곡 너머 병풍처럼 서있는 고봉들. 호수 표면에 마술처럼 담긴 시에라산맥의 준령. 멋진 풍경 속을 걷고 있다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바삐 걷지도 못하지만 핑계 김에 주저앉자 자연이 만든 장엄한 풍경에 녹아든다. 소문처럼 물길 산길을 따라 저절로 멈출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장소가 연속이다.

 

계곡 너머 병풍처럼 서있는 고봉과 울창한 숲. 시에라산맥 특유의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계곡 너머 병풍처럼 서있는 고봉과 울창한 숲. 시에라산맥 특유의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발로 쓴다는 철학자 니체

 

인간은 왜 오르고 걷는가. 자주 쉬는 덕분인지 그런 의문도 든다.

 

걷는 동안 참 좋은 생각을 한다. 나는 발로 쓴다. 나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항상 글을 쓴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신이 죽었다던 니체도 죽었지만, 그 말은 살아 있다. 잘 알려진 그의 책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산을 예찬한다. “나는 방랑하는 자이자 산에 오르는 자다라고.

 

산과 자연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었다. 철학 없는 걷기는 맹목이고, 걷기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는 말도 그가 했던가? 생각은 기특했으나 니체 흉내 내기는 좋으나 머리 쥐나는 철학에는 턱도 없는 상상.

 

가운데 멀리 솟은 흰 고봉이 도브봉이다. 여름에도 눈이 쌓인 해발 4,300m 이상의 봉우리가 병풍을 치고 있다.

가운데 멀리 솟은 흰 고봉이 도브봉이다. 여름에도 눈이 쌓인 해발 4,300m 이상의 봉우리가 병풍을 치고 있다.

 

곧이어 마시 레이크Marsh Lake를 만났다. 역광에 호수 옆 물풀들이 반짝이고 있다. 또 주저앉았다. 푸른 하늘과 파란 호수. 사슴이 뛰노는 초원. 지천인 야생화. 우듬지 큰 제프리 소나무 숲 너머 잔설이 남은 고산준령. 이래서 시에라고원 지역이 미국의 보물소리를 듣는다.

 

하트를 닮은 세 번째 호수를 지나며 수영을 하는 용감한 미국 청년 둘을 만났다. 나도 저렇게 수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깜짝 놀랐다. 송어들이 내 몸을 콕콕 무는 느낌에서였다. 사람을 처음 만나는 송어들의 호기심.

 

이곳의 무수한 호수에는 모두 송어가 살고 있다.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호수에도 살고 있다. 그 번식의 비밀은 물새들에게 있다. 물가에서 먹이를 찾던 새의 발에 송어 알이 묻어서 온 호수로 퍼진 거라고 레인저가 알려줬다. 배낭에 낚싯대를 꽂고 산을 오르는 산악인이 이곳에서는 새삼스럽지 않다.

 

4번째 박스 레이크Box Lake를 지나자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태양은 따갑게 빛나고 푸른 하늘은 호수를 닮아 심연처럼 깊다. 가벼운 고소증 때문에 오름짓이 쉬울 리 없다. 힘들다. 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이 고행의 걷기를 한다. 오르기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보너스가 따른다.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동시에 절절하게 느끼는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5번째 롱레이크를 만났다. 이름처럼 긴 호수를 끼고 트레일이 이어진다. 호수 건너 돌산이 험악하다.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본다면 저 험준한 산속에도 호수들이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자연이 모든 걸 가르쳐 준다는 말이 있다. 살아 있음에 걸을 수 있고, 걸어서 이런 자연을 마주한다는 기쁨. 눈앞의 아름다운 풍광처럼 삶의 고마움을 깨닫는 사색의 트레일.

 

내가 있는 위치와 트레킹 코스를 알려주는 안내판의 등산지도. 리틀 벨리의 7개 호수 사이로 산길이이어진다.

내가 있는 위치와 트레킹 코스를 알려주는 안내판의 등산지도. 리틀 벨리의 7개 호수 사이로 산길이이어진다.

 

일곱 호수와 일곱 개의 풍경

 

제법 가파른 오름짓이 끝나자 오늘의 목적지 모간패스가 보인다. 수목한계선을 넘은 바위산이 아득하게 솟은 사이로 이어지는 산 길. 그러나 그 전에 들러야 할 6번째 닭발호수Chickenfoot Lake가 있다.

 

미국 산은 안내판에 인색해 불편하고, 한국 산은 안내판이 너무 많아 불편하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작은 표지판을 만났다. 닭발호수라는 이름 때문에 그걸 먹지 않는 현지인들이 찾지 않아 그런지 길이 희미하다. 인적 없는 거대한 호수는 과연 예전 포장마차에서 먹던 닭발을 닮았다. 이곳을 생략했으면 크게 후회할 경치였다.

 

사람 눈은 다들 비슷한 건지 조망이 좋은 곳을 찾아 오르면 거기 야영 흔적이 보였다. 시에라산맥의 흐릿한 병풍을 두른 야영 터와 모닥불. 그때마다 비에 인색한 시에라 하늘엔 평생 처음 보는 별들의 쇼가 펼쳐질 터. 그런 상상이 사진처럼 떠오르는 이유는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

 

계곡 물길을 따라 가면 마지막 7번째 젬호수를 만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처럼 덩치가 작은 산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계산은 무모하다. 안타깝지만 실제로 그런 사고가 가끔 일어나기도 했다. 다시 돌아 나와 젬호수로 가는 트레일로 들어섰다. 쉬운 산이 어디 있느냐는 듯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걸어도 힘들다.

 

호수 건너 돌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다. 고도가 높은 탓에 햇살도 강렬했다.

호수 건너 돌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다. 고도가 높은 탓에 햇살도 강렬했다.

 

다시 니체 생각을 떠올린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했었지?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강해진다는 말.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건 고소와 체력 때문이겠으나, 기실 경험이 뒷받침된 것이다. “포기도 버릇이다라는 어느 선배의 말을 힘들 때마다 생각하며 올랐던 산정.

 

고개를 넘어서니 거기 천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석 호수라는 젬호수 쪽은 푸른 초원과 숲이 반짝이는 물길과 함께 그림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선 오늘의 목적지 모간 패스를 올라야 한다. 그쪽은 완벽한 돌산으로 푸른 점 하나 없는 돌무더기. 그늘 하나 없는 돌 사이 오르막길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고도를 높여가며 눈 아래 젬호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에라산맥의 장대한 전망이 가깝게 다가서고 있었다. 젬호수가 하나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보니 5개 이상이 모여 있다. 그 호수가 햇살을 튕겨내며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5번째 호수인 롱레이크는 이름처럼 긴 호수를 끼고 트레일이 이어진다

5번째 호수인 롱레이크는 이름처럼 긴 호수를 끼고 트레일이 이어진다

 

모간 패스(3,413m)에서 돌아섰다. 지도에는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호수를 만난다고 하지만 이제 돌아설 때. 욕심내면 하산이 문제다. 고개에서 내려와 최종 목적지이자 7번째인 젬호수에 도착했다. 푸른 초원과 맑은 개울과 이어진 호수를 거치다 보니 등산로가 끝난다. 찰랑이는 호수 건너 여름을 견딘 잔설이 잡힐 듯 보인다.

 

호수로 가득한 환상적인 리틀 레이크 밸리. 원하는 만큼 종일 산을 담은 청록색 호수를 돌아다녔던 산행. 많은 사람들과 자료는 젬호수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나 7개 호수 중 어느 한 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나머지 호수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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