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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등반지

글: 신영철 회원

 

 

돌밭으로 뒤덮인 ‘검은색’ 발토르 빙하




드디어 발토르 빙하가 보인다. 빙하 얼음 한 가운데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고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인더스 강 또 하나의 원류가 그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물을 쏟아내는 빙하의 검은 동굴이 섬뜩하다. 이제부터 빙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위태로운 길은 예고편이었고 진짜 트레킹은 이제 시작이다. 

빙하를 하얀 얼음의 결정이라고 상상한 사람들에게, 발토르 빙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다. 하얀 색이 아니라 검은 피부를 보여준다. 양쪽 산을 침식하여 빙하는 돌들로 뒤덮여 있다. 카라코람이라는 우르드 말도 ‘검은 암석’을 뜻한다. 우리가 아침마다 피부를 보호하려 선크림을 바르듯 빙하도 하얀 피부를 위하여 돌 화장을 하였을까. 

직경이 4km가 넘는 거대한 빙하는 온통 돌밭이다. 하도 크고 넓고, 광대하여 어느 혹성 땅을 걷는 느낌이다. 빙하 사이로 시냇물이 몇 개나 흐른다. 

흡사 버섯처럼 거대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빙탑들. 

군데군데 꺼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와 빙하호수를 보면 하얀 속살이 보인다. 아니 멀리 찾을 게 아니라 다리를 쉬면서 돌 하나를 들어 보면 거기 유윳빛 얼음이 있다. 

하얀 빙하는 물론 무수히 많다. 발토르를 에워싼 빠유봉, 울리비아호, 트랑고 십튼스파이어, 무즈타크 타워, 마셔브름 연봉 등 셀 수없이 많은 산마다 하얀 빙하 하나씩을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빙하엔 흡사 버섯처럼 거대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빙탑이 보인다. 

마술 같다. 어떻게 저 큰 돌을 얼음 기둥이 이고 있을까. 주변의 얼음은 햇볕에 녹아 인더스 강으로 흘러들어 가지만 돌 밑의 얼음은 녹지 않는 게 마술의 간단한 원리다. 

그걸 알지만 무리를 지어 서있는 돌 버섯은 여전히 놀라운 형상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런 생명이 살 수 없는 빙하 돌 틈에 눈물겹게 피워낸 붉은 야생화를 볼 때였다.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한 송이가 여기에선 소중하게 생각 드는 것은 
그만큼 척박한 풍경이라는 반증이다. 

돌 쌓인 빙탑을 오르내리며 거의 기진할 때쯤 막영지 우르드까스가 나타났다. 
고도는 4,010m를 가리킨다. 막영지는 물이 좋았다. 빙하도 물이고 폭포도 많은 물 천지에서 물이 귀하다는 건 아이러니다. 가이드북에서 이르기를 발토르에서는 
물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회색빛 탁류를 거리낌 없이 먹는 현지 사람들에게 물이 풍년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르는 말이겠다. 
우르드까스 물 역시 샘물처럼 맑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끓이면 먹을 수 있겠다. 




거대한 빙하는 온통 돌밭이고 빙하 사이로 시냇물이 몇 개나 흐른다. 
군데군데 입을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와 빙하호수를 보면 하얀 속살이 보인다.

우르드까스의 막영지에 텐트를 쳤다. 
텐트 문을 모두 열고 느긋하게 누워 에워싼 산들을 감상하는 풍경은 또 다른 재미였다. 
해넘이를 맞아 빙하를 에워싼 산들은 아우라를 등지고 있다. 
하얀 산 뒤로 숨은 햇빛이 빔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아우라는 천지창조를 보는 느낌이다.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찾아 온 고소증 때문에 뒤척인 밤이었다. 
이튿날 해뜨기 전 빙하 언덕을 올라서니 숨 막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가셔브룸 4봉이 발토르 빙하 끝을 막아선 채 빛나고 있다. 정말 그랬다. 
삼각형을 이룬 거대한 그 산은 빙하를 막고 있었다. 
20m가 모자라 8,000m 봉에 들어가지 못한 산이 가셔브룸 4봉이다.
삼각 도형을 반으로 자른 듯 깎아지른 서벽이 너무 거대하여 
‘빛나는 벽’이라 불린다. 
하기야 가셔브룸이라는 어휘 자체가 ‘빛나는 산’이긴 하지만. 
이제 우리의 항해는 저 서벽을 등대 삼아 나가야 할 터였다.

자고 깨면 걷는 일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간단해서 좋다. 세상일을 걱정하기엔 너무 멀리 왔고, 
일상의 소소한 일 따위에 신경 나누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다시 빙하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떴고 너무 뜨겁고 힘이 들어, 바위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까맣게 그을린 남녀가 나타났다. 
검은 고글을 쓰고 있어 누군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꾸벅 인사를 한다.
브로드피크 등정을 끝내고 내려오는 김재수, 고미영씨였다.
당연히 만날 줄 알았지만 반가웠다.
“무서웠고 힘들었어요.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에 갔다가 캠프로 귀환하기까지 꼬박 23시간 40분이 걸렸어요. 
루트 중간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체코 산악인 시체도 있었고요.”

여성 클라이머로 아시아 경기 3연패를 달성한, 철의 여인이 고미영씨다. 
8,047m 브로드피크 정점을 오른 그런 강인한 여인이,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일러바치듯 등반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해냈다는 긍지가 슬쩍 엿보인다. 
그녀는 이로써 에베레스트, 초오유를 포함하여 3개봉의 자이언트를 올랐다. 
한국의 유수한 등산장비 생산업체는 이 여성에게 
14개의 8,000m를 모두 오르라는 주문을 했다. 돈 걱정은 말고. 

그러나 세상에 경쟁 없는 부분이 어디 있을까. 
지금 K2에서 등반 중인 오은선씨가 그 경쟁상대다.
버거운 경쟁이다. 오씨가 K2를 성공한다면 고씨에 두 개봉이 앞서 5개가 된다.
세상의 시선은 이 두 여자에게 집중되게 되어 있다.

엄홍길, 박영석으로 대변되었던 남자들의 경쟁이 여성 산악인에게 넘어왔으니까.
“작년 에베레스트 대원으로 참가해 함께 정상에 오른 
김재수 대장님이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죠. 
경험도 많고 등반 능력도 뛰어나니까요. 
14좌 끝까지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귀국하면 좀 쉬다가 가을엔 시샤팡마를 갈 계획입니다.”

“김 대장은 시샤팡마를 올랐었는데 또 가요? 
고미영씨에게 반했나 보군요. 이번 등반에서 남녀가 한 텐트를 썼을 텐데, 
무슨 일이 없었나요? 조사 좀 해봐야겠네요.”

물론 농담이다. 죽기 살기로 오르다 진짜 죽는, 
살벌한 눈 속 텐트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 
다시 한번 등정을 축하한다는 덕담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들은 아래로, 우리는 위로.

지겨운 빙하 길을 걷는데 소 한 마리가 포터 손에 끌려 앞서가고 있다. 
등짐을 지지 않은 걸 보아 틀림없이 원정대 체력보강에 쓰일 식용이다. 
원정대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팀의 형편에 따라 염소나 양을 선택한다, 
선택받은 동물들은 죽는지 모르고 제 발로 걸어 베이스캠프로 향한다. 
저 소를 먹어치울 원정대라면 아마 대규모 팀일 것이다. 

도망쳐라! 한발 밖에 생이 있느니. 
사람이 찾지 못할 산으로 도망쳐야 그래야 넌 산다! 
그런 주문을 포터 몰래 외워봤지만 당연히 반응이 없다. 
역시 동물은 바보다. 아니면,
내 한 몸 바쳐 등반대원들 평생 꿈인 정상 등정을 이뤄낸다면… 하는 
순교의 길을 가는지도 모르겠다. 




브로드피크 등정을 끝내고 내려온 김재수, 고미영씨와 그들을 도운 셀파들. 

신영철
(소설가·재미한인산악회원) 

미주 한국일보 연재. 2-0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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