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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의 산 이야기] ‘LA의 북한산’에서 지옥도를 보다

신영철
  • 입력 2023.02.16 07:15
  •  
  • 수정 2023.02.17 10:59
  • 사진(제공) : 재미한인산악회
   
 

1월 1일 눈보라 속의 체감온도 영하 30℃ 발디봉(3,068m)을 오르다

얼음 망부석이 된 나무가 거인처럼 도열해 있다. 첫 번째 고개를 넘는 길, 눈보라가 심했지만 정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얼음 망부석이 된 나무가 거인처럼 도열해 있다. 첫 번째 고개를 넘는 길, 눈보라가 심했지만 정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2023년 1월 1일 일요일. 새해를 여는 첫 산행은 올해도 발디봉Mt. Baldy(3,068m)이다. 지난해처럼 재미한인산악회(회장 유경영) 팀과 함께 오르기로 했다. 이번 겨울 캘리포니아는 잦은 폭우가 내렸다. 그 비가 산에서는 몽땅 눈이 될 터. 

LA 인근 산의 적설량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차량을 나눠 타고 발디로 가는 중에도 비가 내린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재미한인산악회답게 이들은 설산雪山 등반을 기대하며 길을 나선 것이다.

“3일 전 발디에서 한국산악인 한 명이 추락사했다던데 혹시 누군지 아세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 사고가 화제였다. 연말부터 LA 일원에 겨울 폭풍이 계속되고 있었다. 샌 게브리얼산맥의 최고봉 발디는 높이 10,064피트, 미터로는 3,068m이다. 발디는 눈 많기로 소문난 산. 그때 발디를 오르다 추락사한 한국인이 있었다. 불과 사흘 전인 12월 29일이었다. LA에서 세무사CPA로 일하던 최모씨가 발디에서 추락했고, 나머지 한 명의 일행은 구조되었다. 

발디봉Mt. Baldy(3,068m) 등산로 초입에만 눈이 적었다. 고도를 높이자곧 설국이 나타났다.
발디봉Mt. Baldy(3,068m) 등산로 초입에만 눈이 적었다. 고도를 높이자곧 설국이 나타났다.

최씨는 실종 11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재미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그 소식을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겨울 폭풍에 수색이 지장 받을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다. 몇 년 전에도 한인 전문산악인 한 명이 실종되어 재미연맹과 함께 구조에 나선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실종자도 결국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런 사고는 LA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산악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사고는 꺼림칙하지만 그렇다고 연례행사인 산행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헬멧과 아이스엑스(아이스바일)까지 준비한 회원들이 발디봉 남벽South Face 직등을 꿈꾸며 모인 것이다. 산 정상에서 사발처럼 둥글게 쏟아져 내린 남벽을 ‘발디 볼Baldy Bowl’이라 부른다. 지난해에도 신년 산행을 이곳에서 했다. 

발디 볼 루트를 통해 설벽 직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눈이 많았던 덕분이다. 즐거움과 아픔을 동시에 주는 눈의 이중성. 작년엔 날씨가 좋았고, 지금처럼 폭풍설이 오락가락 하지 않았다. 우리 팀이 고도를 꾸준하게 올리자 눈보라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남벽 아래 도착해 상황을 보자는 의견을 모아 계속 고도를 높여 갔다. 

대피소로 사용되는 스키헛에서부터 본격적인 설산 산행이 시작된다. 재미한인산악회원들이 스키헛에서 러셀 채비를 한 후 나오고 있다.
대피소로 사용되는 스키헛에서부터 본격적인 설산 산행이 시작된다. 재미한인산악회원들이 스키헛에서 러셀 채비를 한 후 나오고 있다.

무서운 악천후, 포기는 없다

매년 신년 산행을 할 때면 이 산에서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LA의 북한산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 산악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발디봉. 그런데 한국인은 고사하고 미국 산악인도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악천후 때문이다. 

대피소로 사용하는 스키헛에 도착하니 눈보라가 더 심해진다. 한인산악회는 히말라야나 고산원정이 있을 때면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 희미하지만 누군가 눈밭을 밟고 간 반가운 러셀 자국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 눈보라라면 발자국도 곧 지워질 것이다. 

여기서 많은 회원들이 등반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몇 명의 회원들은 산행을 이어갔다. 누구나 눈에 익은 발디 정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새해 첫 산행 아닌가. 눈발은 거세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 

고도를 올리자 깊은 눈 세상으로 변했다.
고도를 올리자 깊은 눈 세상으로 변했다.

아이젠 발톱에 찍히는 눈 표면이 얼어 있다. 고도를 올릴수록 기존 등산로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고로 직선으로 치고 오른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해서 발디 볼, 급경사면 쪽으로 러셀 흔적이 있나 열심히 살폈다. 누군가 발디 볼 설벽 선등을 했다면 우리도 따를 요량이었다.

그러나 흔적이 없다. 눈 표면이 바람에 얼어붙은 걸 크러스트Crust되었다고 말한다. 눈이 크러스트 되면 눈사태의 염려는 없으나, 그 위에 오늘처럼 신설이 쌓이면 눈사태가 난다. 요즘처럼 잦은 눈에 발디 볼이 위험해 아무도 직등을 하지 않은 것이다. 오랜만에 장착한 12발짜리 아이젠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정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겨울 발디봉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그걸 잘 알고 있다. 눈 속 왕복 거리가 13km쯤이고 극복해야 할 고도가 1,200m나 된다. 두 번째 새들saddle(안부)에 올라서니 화이트아웃Whiteout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화이트아웃은 눈雪으로 시야가 심하게 제한되는 상황을 말한다. 사방이 온통 흰색으로 도배되어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다. 사방팔방이 하얗게 채색된 세상은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자신의 위치를 인지할 수 있는데, 일순간 그게 사라지는 백색의 공간. 

나무마다 얼음꽃을 피워내고, 숲은 눈 터널을 만들었다.
나무마다 얼음꽃을 피워내고, 숲은 눈 터널을 만들었다.

평소 강한 산악인이란 평가를 받던 회원 한 명이 “여기까지”라며 등반을 포기한다. 14명이 시작해 5명만 남았다. 그러나 수십 번 오른 발디 정상이 지척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 고개 하나만 더 올라서면 정상은 눈앞이고, 가파른 오름길도 수굿해질 것이다. 그런 유혹이 등반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눈보라는 잦아들지 않는다. 화이트아웃이 심해 허방다리 걸음을 할 때면 바람을 등지고 한참을 쉬었다. 나무마다 빙화氷花를 피워내고 있었다. 굽자란 나무들은 가지마다 철갑 고드름을 달고 있다. 가끔 그 고드름에 부딪히면 맑은 쇳소리가 났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눈꽃雪花이나 상고대 풍경은 가끔 보았으나, 온통 얼음꽃이 피어난 얼음 세상은 처음 만난다. 

등산로 표지판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이 이채롭다.
등산로 표지판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이 이채롭다.

지옥도가 펼쳐진 정상

발은 시려오고 볼은 얼얼하지만 얼음왕국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그럴 때면 독사 약 올리듯 화이트아웃이 벗겨져 시야가 터진다. 정말이지 정상이 멀지 않은 걸 수없이 올랐던 경험으로 안다. 뒤에 오는 동료들이 눈보라 속에 지워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드디어 두 번째 새들도 지났다. 이제부터 급경사는 없다. 뒤에 오는 동료들이 언제 포기할지도 모르니, 나라도 정상 사진을 찍어 놓아야 했다. 장갑 속 손가락에 통증이 온다. 버프로 칭칭 동여 맨 얼굴 틈으로, 얼음바늘이 쉴 사이 없이 날아들었다. 

기어이 홀로 정상에 올랐는데, 그렇게 만난 발디봉 정상은 지옥도였다. 울부짖는 바람의 포효, 바람 속에 날아다니는 얼음 조각.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었던 정상 표지판도 얼음에 파묻혀 찾을 수 없다. 눈알이 얼 정도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였다. 원근은커녕 위, 아래도 희미한 화이트아웃이 점령한 정상. 

눈보라를 막으려 입은 판초우의가 엉망이 되었다.
눈보라를 막으려 입은 판초우의가 엉망이 되었다.

날씨가 좋으면 언제나 울고 싶을 만큼 멋진 파노라마 풍경을 선사했던 정상. 오늘은 지옥으로 바뀌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안내판이 기괴하다. 더는 버틸 수 없어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올라 온 방향을 모르겠다. 수목한계선을 넘어 선 발디봉 정상은 ‘대머리’라는 그 별명대로 넓고 둥글다. 

화이트아웃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걷기 쉽다. 겁이 덜컥 났다. 둥근 대머리 정상을 벗어나면 엄청난 직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그걸 잘 알고 있다. 클라이밍이 필요한 발디 볼 루트로 추락할 수도 있다. 화이트아웃에는 경험이 중요하지 이론은 쓸모없다. 나침반이나 독도 그리고 등산로를 가리키는 앱도 소용없다. 

당황하지 마, 천천히 기다려

금방 올라 선 내 발자국도 지워졌는지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찾아도 없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 기다려. 천천히.” 

선 채로 이중화 속 발가락, 미튼 속 손가락을 끊임없이 꼼지락 거렸다. 동상이 무서웠으니까. 

화이트아웃이 잠깐 벗겨지기를 기다렸다. 간절함에 화답이라도 한 것일까. 잠시지만 얼음 무게에 꺾어진 소나무가 보인다. 그쪽 방향에서 올라오며 혹시 몰라 눈도장을 찍어 놓았던 부러진 소나무. 

러셀 자국은 금방 내린 신설에 계속지워지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화이트아웃이었다. 방향 감각을 잃기쉬워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조난될 것 같았다.
러셀 자국은 금방 내린 신설에 계속지워지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화이트아웃이었다. 방향 감각을 잃기쉬워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조난될 것 같았다.

방향을 잡고 정상에서 내려가기 시작하니 포기하지 않은 독한 동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람을 피해 얼음철갑으로 중무장을 한 나무 밑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나무 전체가 거대한 얼음꽃 조각이었다. 정상을 올라간 동료가 나처럼 방향을 잃을까 해서 인간 표지판이 된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니 추위에 온 몸이 심하게 떨린다. 겨울 발디봉은 거의 매년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기사도 떠올랐다. 과학은 정직한 동시에 정확하다. 고도를 100m 올리면 기온은 0.6℃ 떨어진다. 풍속이 초속 1m일 때 체감온도는 약 1.6℃씩 내려간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3,068m 발디봉 정상 체감온도는 영하 30℃가 넘을 것이다. 

내려오지 않는 동료들이 걱정되었지만 홀로 하산할 수는 없는 일. 기다림이 간절할 즈음 유령처럼 동료들이 화이트아웃을 뚫고 나타났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교과서대로 팀이 뭉친 건 잘한 일이었는데 이제 단체로 길을 잃었다. 서로 다른 방향이 맞는 것 같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건 그 판단이 더 큰 사고, 떼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 

2년 전에 오른 발디봉 정상부.날씨가 좋을 때는 시원한 경치가펼쳐진다.
2년 전에 오른 발디봉 정상부.날씨가 좋을 때는 시원한 경치가펼쳐진다.

단체로 겪은 환상방황

우리는 단체로 링반데룽Ringwanderung 현상을 경험했다. 환상방황環狀彷徨으로 번역되는 이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 환상방황은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둥글게 맴도는 일을 말한다. 자신은 제대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똑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게 환상방황. 

무전기가 바쁘게 울리기 시작했으나 그 또한 공허한 일. 한꺼번에 모여 그저 화이트아웃이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야가 잠깐 터진 틈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고맙게도 우리가 올라 온 희미한 아이젠 자국을 찾아 낸 것. 

눈에 익은 안전한 새들까지 도착하자 모두 퍼져 앉아 쉬었다. 더 이상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배고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추위에 배낭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을 강심장은 없었다. 

맑을 때의 발디봉 오름 길.
맑을 때의 발디봉 오름 길.

오를 때 내렸던 눈은 하산할 때도 쉬지 않았다. 뻐근한 하산을 마쳤는데도 발디봉은 토라진 여자처럼 얼굴을 감추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 보이는 북한산처럼, 겨울이면 LA시내 어느 곳에서나 흰 눈을 덮어쓴 발디봉 정상을 볼 수 있다.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고도인 3,068m의 존재감. 사막의 도시 LA에 이토록 아름다운 설산이 있음을, 누군가는 믿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2023년 1월 1일 새해 첫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 순백의 산에서 스스로 환상방황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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