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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뮤어 트레일] 30km 걷고 호숫가 야영 숟가락으로 떠먹는 위스키 맛

신영철
  • 입력 2022.09.22 09:39
  •  
  • 수정 2022.09.27 09:52

 

  • 사진(제공) : 박시몬 재미한인산악회

 

존 뮤어 트레일

도나휴 패스 투올로미 초원 캐시드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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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휴패스(3,372m)를 넘어 투올로미 초원으로 가는 길. 여기서부터 요세미티국립공원에 속한다.

 

지난 호 사진을 본 독자들은 알 것이다. 존 뮤어 트레일JMT은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걷는 화첩기행畫帖紀行이란 걸. 지난 시간 천섬호수Thousand Island Lake를 거쳤다. 아일랜드 패스Island Pass(3,116m)에서 야영한 후 푸르게 깨어나는 시에라산맥의 아침을 맞았다.

 

삐쭉빼쭉한 4,000m대 침봉 정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온다. 저렇게 여명을 밀어내며 시나브로 정상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그림. 어디서 봤더라? 아아, 맞다. 수목한계선을 한참 넘어선 히말라야에서 맞았던 아침이다. 히말라야에서는 고소 증세로 머리가 아팠는데 이곳은 그런 게 없어 좋다. 시에라산맥의 신새벽 고요와 서늘함까지도 마음에 든다.

 

아일랜드 패스를 내려서자 물소리가 요란하다. 지도를 보니 러시 크릭Rush Creek이다. 트레일 곁을 따라가는 러시계곡이 물풍년이다. 사방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눈 맑아지는 경치에 한동안 다리쉼을 한다. 며칠을 묵었는지 어느 트레커가 쳐 놓은 텐트도 보기 좋다.

 

JMT는 여러 기록을 가지고 있다. 네 살 먹은 아이의 종주기록, 84세 할머니의 한 달이 넘는 종주. 그리고 3일 몇 시간 만에 350km 전 구간을 뜀박질로 종주를 끝낸 사내. 누가 더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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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색 하늘, 푸른 초원,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나는 뜀박질한 사람들의 행위는 존중하되, 존경하지는 않는다. 이곳은 뛰는 산길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별스런 사람은 넘치겠지만, 이 길의 주인공 존 뮤어는 말했다.

 

자연과 함께 걸을 때마다 사람은 그가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는다In every walk with nature one receives far more than he seeks.”

 

뜀박질 기록보다 84세 할머니가 오랜 시간 걸려 천천히 걸어 종주한 게 더 부럽다. 풍경을 천천히 뒤로 밀어내며 쉬엄쉬엄 걷는 길. 경치 좋은 곳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머물며 주변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도 부럽다.

 

알고 보니 그렇게 산을 즐기는 고수들이 많았다. 멋진 자연에 녹아들어 스스로 자족하는 여유. 그게 한 수레의 책을 읽는 것보다 좋다고 존 뮤어 선생은 말한다. 이런 풍경 속에 녹아들어 며칠을 즐길 마음 준비는 되어 있는가? 있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 요세미티, 킹스캐니언, 세쿼이아국립공원 세 개가 이 산길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니까. 힘든 기억은 지우고 즐거운 추억만 남기는 트레일이기에 매해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이 철철 넘치는 크릭을 벗어나니 오름길이 시작된다.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햇살은 따갑다. JMT는 걷기에 최적화된 산길이라는 생각이다. 평균 고도 2,500m를 넘나드니, 낮 평균 온도는 20정도. 거기에 습기 없는 건조함에 땀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물길 따라 오르는 트레일은 가공되지 않는 뽀송한 맨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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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제호를 닮은 산자 또렷한 요세미티국립공원 내의 봉우리. 한문이 상형문자라는 걸 증명하는 듯하다.

 

숲을 벗어나는 걸 보니 다시 수목한계선을 넘어 선 모양. 나무는 사라졌으나 초원 물길은 여전히 졸졸 흐른다. 눈앞에 펼쳐진 병풍처럼 바위산들이 어깨 걸고 막아서 있다. 몇 번 넘었던 도나휴 패스가 어디쯤인지 아리송하다. 아마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 고여 있는 저쯤이겠다.

 

요세미티공원을 무료로 입장하다

 

해발 3,000m가 넘는 도나휴 패스가 힘들다. 고소 때문인지 달구어진 바위길 사이가 고역이다. 그러고 보면 존 뮤어 트레일 본질은 고행길이 맞다. 자연은 보기엔 좋아도 그 속 생존은 치열하다. 보기 좋은 것으로 생명이 살 수는 없는 일. 준비하지 않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산악인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어울리는 훈수. 자연의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실시간 증명되는 곳이다.

 

살이 통통한 마모트Marmot가 해바라기를 하다가 바위 뒤로 숨는다. 대를 이어 붙박이로 살아가는 마모트가 땅 주인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 매일 만났던 사슴이나 곰, 크릭의 송어 떼가 주인이다. 자연이라는 말뜻처럼 저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들. 가공되지 않아 눈 맑아지는 자연은 준비된 자들에게만 내밀한 속을 보여 준다. 걷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고 행복해지는 일이다.

 

해발 3,000m가 넘자 바위뿐이다. 쉬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다. JMT에서는 조급하면 지친다. 출발하기 전 공부한 대로, 하루치만 걸으면 되니 빨리 갈 이유가 없다. 그렇게 도나휴 고개Donohue Pass(3,372m)에 올라섰다. 이번 산길에서 가장 높은 곳. 하얀 눈이 지금도 트레일을 점령하고 있다. 고개인데도 정상에 몇 개의 호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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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휴패스에서 경미한 고소증으로 통증을 겪은 대원들은 점심도 거른 채 누워버렸다.

 

배낭을 벗어 놓고 주변을 감상한다. 왼쪽으로 라이엘Lyell(3,997m)산이 우뚝하다. 라이엘은 요세미티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산. 미국에서는 높이 14,000피트(4,267m) 이상의 산을 포티너스Fourteeners, 혹은 14ers라 부른다. 캘리포니아에는 모두 15개 봉우리가 있다.

 

우리가 걷는 시에라산맥에만 12개의 포티너스가 솟아 있다. 이러니 산악인들에게 이 산맥은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듣는다. 전 세계 트레커들이 이곳에 서기를 소망한다. 허가증을 못 받아 3, 4수를 하며 이 산길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 노하우가 있지만 단체 허가를 받아 낸 건 행운이었다.

 

바위에 안내판이 보인다. 우리가 걸어 온 앤셀 아담스 황야보호구역과 요세미티 사이의 경계점. 이제 요세미티국립공원 구역으로 들어섰다는 걸 알려 준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 입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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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즉통, 술이 모자라 소위 숟가락 주로 건배를 하고 있는 대원들

 

 

남자들을 모이게 한 위스키 한 병

 

고갯마루 호숫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물을 끓이는 사이 머리가 아파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버린 대원이 보인다. 해발 3,300m가 넘는 곳이니 민감한 사람은 고소를 느낄 만하다. 점심을 먹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고소증 특효약은 빨리 고도를 내리는 것. 눈길을 걸어 산 반대편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비행기 창에서 보이듯 질펀한 투올로미 초원이 눈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다. 초원 사이 뱀이 똬리를 틀 듯 사행을 그리며 투올로미강이 흐르고 있다. 아이맥스 스크린이 크다지만, 비교가 불가능한 대단한 파노라마 풍경이다.

 

하산을 재촉하는 우리 등 뒤, 검은 라이엘산 중턱에 하얀 빙하가 걸쳐 있다. 저 빙하가 바로 투올로미강의 발원지.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 강은 수백 km 밖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중요한 식수원. 여기부터 발원하는 계곡은 산 이름을 따 라이엘계곡으로 부른다.

 

끝 간 데 없이 넓은 초원에 내려서니, 수채화 속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사슴 몇 마리가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를 꺼내도 도망갈 생각이 없는 걸 보면, 사슴이 우리를 즐기는 것도 같다. 물길을 건너서 적당한 야영지를 만났다. 텐트를 쳐놓고 강에서 목욕을 했다. 개운하다. 비누도 없는 목욕인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렇구나. 행복한 감정은 조그마한 것에서 꺼내 올 때 더 좋다. 멀리 있는 행복을 애써 잡으려 뛰어 갈 게 아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곁에도 있다는 깨달음. 그래도 아쉬움이 있다. 하루 행정을 끝내고 나서 목을 적셔야 할 알코올이 없다는 것.

 

그런데 놀랍게도 대원 한 명이 작은 위스키 병을 꺼내 놓는다. 눈이 커진 남자대원들이 빙 둘러 앉았다. 덩치들에 비해 병 크기가 너무 작다. 그러나 궁즉통, 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혼자 마셔도 모자랄 알코올. 누군가 그 술을 그릇에 부었다. 돌아가며 숟가락으로 한 번씩 떠먹는 음주.

 

무섭다는 코로나 감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곤궁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보인다는 궁즉통은 숟가락 주를 발명했다. 정말 모자란 듯한 행복은 작은 숟가락 주에도 있었다. 밤새 흐르는 강물이 자장가 역할을 했는지 단잠을 잔 기분 좋은 아침. 초록 초원과 물안개 피는 강의 몽환적인 풍경. 따가운 해가 뜨면 이내 사라질 현상이라는 게 아쉽다.

 

아쉬운 건 또 있었다. 이곳부터 세 명의 대원이 헤어질 120번 도로까지 16km쯤 남았다. 거기서 세 명의 대원은 문명세계로 복귀하고, 본대는 요세미티까지 길을 계속 이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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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토박이로 살고 있는 살찐 마모트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요세미티공원에 산불 발생!

 

투올로미 메도우. 이 초원길은 멕시코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과 겹쳐 있다. 간간이 낡은 등산복 차림의 트레커들을 만난다. 그들이 PCT 종주자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우리보다 더 남루하고 까맣게 그을렸으니까.

 

얼굴이 동그란 동양 여자를 만났다. 한국인이기를 기대했는데 대만에서 왔다고 했다. 이름을 물었고 그녀는 레이디 버드Lady Bird”라고 답했다. ‘트레일 네임이 분명하다. 장거리 산행을 할 때 본명 대신 사용하는 닉네임을 트레일 네임이라 부른다. “왜 이곳에 왔느냐?”는 질문은 간단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대답은 책 한 권 분량이 될 수도 있다. 얼굴이 다르듯 장거리 트레일에 온 이유도 제 각각일 테니까. 민감하고 아픈 사연도, 이유 없는 동기도, 말 못 할 사정도 있을 것이다. 길에서 만났고, 길에서 헤어질 인연들이 트레커 아닌가. 그러니 본명도, 사연도, 묻지 말라는 문화가 이들 사이 트레일 네임으로 만들어진 것.

 

처럼 자유롭고 싶은가? 레이디 버드와 헤어지며 입속에서 물었다. 멀리 초원 끝에 하프돔 닮은 화강암 렘버트 돔Lembert Dome이 보인다. 왼쪽으로 성당 첨탑처럼 캐시드럴 피크가 날카롭게 서있다.

 

드디어 요세미티를 관통하는 유일한 120번 도로와 투올로미 캠프장에 도착했다. 아스팔트가 반갑다. 원래 이곳에서 묵기로 했는데 캠핑장은 공사 중.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6.5km 인근에서는 야영을 금지한다는 경고도 보인다. 꼼짝없이 캐시드럴호수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식수가 있어 야영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간이우체국과 천막식당이 있다.

 

모두가 칭찬 일색이었던 햄버거를 고대했는데 팬데믹이라 판매를 하지 않는다. 나쁜 소식은 또 있었다. 바로 어제 요세미티국립공원 마리포사 그로브 지역에서 큰 산불이 시작되었다는 뉴스. 마리포사는 3,000살 이상 된 자이언트 세쿼이아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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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드럴 호수의 저녁 반영이 멋지다. 모기가 극성이라 힘든 와중에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산불 연기는커녕 잉크를 풀어놓은 듯 파랗다. 다행히 공원 측은 그쪽 입구만 막고 요세미티공원을 폐쇄하진 않은 모양. 레인저들이 막아서면 작년에 이어 올해 종주도 실패하게 된다. 요세미티국립공원 크기는 제주도의 1.5. 그래서 같은 공원임에도 통제하지 않는 것 같으니 계속 진행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곳에서 3명의 대원과 이별하고, 본대는 알코올을 보급 받아 길을 나섰다. 도나휴 패스를 넘고 투올로미 초원을 횡단한 오늘은 강행군이다. 2,900m 고도의 야영지 캐시드럴호수에 도착하니 오후 8시에 가까웠다. 해는 지고 있었고 거의 30km를 주파했다.

 

오늘 무리해서 고도를 올렸고 거리를 줄였으니 내일은 여유가 있을 터.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선라이즈Sun Rise 초원까지 쉬운 길이 이어질 것이다. 이곳에 오며 인상적인 표어를 만났다. 곰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엔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신은 손님이고 이곳은 곰의 나라다. 손님으로 예의를 지켜라.’

 

머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 이곳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주인이라는 주장. 하지만 주인이라도 모기에게 예의를 지킬 수는 없다. 캐시드럴 호수 모기는 극성이었다. 모기와 전쟁 중에도 호수에 비친 반영反影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요세미티 대형 산불이 걱정이다. 과연 우리는 계획대로 종주를 끝낼 수 있을까.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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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산(http://s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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