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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 Ridgeway

신영철의 휴먼알피니스트 _ 릭 리지웨이 

 

Rick Ridgeway

  

‘2017 울주세계산악문화상수상자

미국의 산악문화 전도사

 

· 신영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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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Asia)는 잘 있는가?

 

미국에 아시아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백인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온 책 <아버지의 산>은 산악인 릭 리지웨이가 쓴 책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습자지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먹물처럼 감정이입이 되어 속절없이 눈물이 흘렀던 책. 피부색과 언어는 달라도 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같은 것이어서 그런지 모른다.

 

스토리는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고전적 이야기다. 198010월 리지웨이는 아웃도어 회사로 유명한 이본 쉬나드와 티베트를 찾는다. 미니아콩가(MinyaKonka·7556m)를 오르기 위해서다. 그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가 조나단 라이트(Jonathan Wright)도 동행한다. 격렬한 등반 중 눈사태를 맞은 조나단은 리지웨이의 무릎 위에서 죽는다. 당시 미국 조나단 집에는 생후 16개월 된 딸 아시아(Asia)가 있었다. 아기가 방긋 웃어 주는 옹알이만으로도 세상 모든 아빠는 행복하다.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조나단은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아시아라는 이름을 지어 놓았던 터.

 

등반을 멈춘 리지웨이는 조나단 시신을 수습해 돌무덤을 쌓아 놓은 후 귀국한다. 리지웨이가 살던 곳 벤추라는 파타고니아 본사가 있는 곳이다. 같은 동네에 살던 조나단의 딸 아시아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파타고니아 창업주 이본 쉬나드의 딸, 그리고 리지웨이의 딸과 함께 같은 학교를 다니며 성장한다. 리지웨이 부부는 아시아를 친딸처럼 사랑하고 챙겼다. 리지웨이의 배려 속에 아시아는 성장했고, 파타고니아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산도 배웠다.

 

리지웨이는 말한다.

어느 해 여름이 끝물이던 때였다. 아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자신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아빠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나 성장했던 아시아였다.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듣던 아시아는 나에게 티베트 아빠 무덤으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언젠가 아시아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을 걸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시아가 19세가 된 1999,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티베트로 떠난다. 등반여행 중 불교, 철학, 등반과 여러 이야기가 함께 엮여져 삶을 관조한다. 오지를 여행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 둘은 아버지 조나단이 못 오른 미니아콩가를 오르고 돌무덤을 찾는다는 스토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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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서 암벽 등반중인 리지웨이

 

벤추라 파타고니아 본사

 

파타고니아 본사에서 악수를 나눈 리지웨이는 여전했다. 활짝 웃는 모습과 굵은 주름은 하회탈을 닮았다. 이번에도 역시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 아웃도어 회사 특유의 콘셉트다.

 

우리는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분방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게 아웃도어의 본질이 아닌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게 벌써 7년이 흘렀다고?”

 

뜨거운 8월인데도 태평양을 끼고 있어 시원한 느낌이 든다. 본사 입구 왼쪽에 회사에서 직원들 자녀들을 위해 운영하는 유아원이 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7년 전 그대로다.

 

내 딸도 이 유아원 출신이다. 지금 이 회사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고 있고 딸이 낳은 내 손녀도 지금 이 유아원에 있다. 우리는 삼대가 이곳에서 대를 이어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조나단의 아시아도 이 유아원 출신이었을 것이다. 미팅룸에서 리지웨이를 마주했다. 그에게 물었던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아시아의 근황이었다. 아시아는 뉴욕의 나이키 본사에서 근무했고, 아주 잘나가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아이가 둘인 엄마가 되어 있다고 했다.

 

내 딸과 같은 아시아는 아버지를 찾은, 그때의 티베트 등반여행에서 자신을 감싼 그늘을 극복해 내었다. 매사 자신감을 찾은 아시아 성격은 밝게 바뀌었고 사회생활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아시아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기쁘다. 우리는 아시아를 사랑한다.”

 

인간과 산의 관계를 포괄하는 산악문화는 특별하다. 위대한 자연과 산 앞에 한없이 작아 보이는 게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 작고 약한 인간은 말없는 산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런 과정에서 감동이 있고 슬픔이 있으며 깊은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그런 경험이 체화되어 있어야 옳은 산악문화를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리지웨이 같은 사람이 경험했던 산이다. 그런 지혜가 산악문화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가자. 우선 ‘2017 울주세계산악문화상을 수상한 걸 축하한다.”

 

고맙다. 사실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처음 한국지사를 통해 통보받았다. 그래서 울주세계산악영화제를 알았다. 조사해보니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산악영화제였다. 아주 바람직한 산악문화가 바로 영화제다. 영상보다 더 큰 파괴력은 없다. 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 잘 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미국에서도 기여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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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가 본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리지웨이의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미국에 현존하는 가장 지적인 산악인이자 순도 높은 산악문화의 생산자이기도 하니까. 그가 발표한 많은 저작들은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자연과 산에 대한 논픽션이면서도 소설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뉴욕 타임스> 선정 ‘10대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르기도 했던 잘 팔리는작가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영상에도 일가를 이루어 20여 편의 산악·탐험 다큐멘터리를 직접 감독·제작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영상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미국을 망라한 어드벤처 사진과 필름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으니 산악문화상에 참 잘 어울리는 인물의 선정이다.

 

리지웨이는 산악계 선배이기도 한 이본 쉬나드에게 발탁되어 2000년부터 파타고니아의 공식 이사회 멤버로 시작해 지금까지 사회공헌 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다. 푸른 눈에 백발, 그리고 편하게 입은 헐렁한 셔츠와 반바지,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리지웨이. 이 회사의 사주인 이본 쉬나드를 처음 만날 때도 같은 복장이었다. 그렇게 보니 이본 쉬나드와 리지웨이는 정말 많이 닮았다. 우선 둘의 키가 똑같다. 작다는 이야기. 얼굴로 산과 탐험을 다니는 게 아니라는 듯 야생에 어울리는 표정들이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는 말. 그러나 이들 삶의 동선은 크다 못해 거대하다. 정말 작은 거인들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뼛속까지 환경론자

 

이 사진을 봐라. 이본 쉬나드, , 그리고 노스페이스 창업자 톰킨스(Tomkins)이다. 파타고니아 헤네랄 카레라 호수에서 카약을 타며 찍은 사진이다. 그때 톰킨스가 익사했는데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연을 즐기던 그때의 사진이다. 불과 18개월전 이야기다.”

 

미팅룸에 비치된 사진에는 이본 쉬나드와 톰킨스 그리고 리지웨이와 또 한명의 남자가 보였다. 2인승 카약엔 톰킨스와 리지웨이가 함께 타고 있었다. 파타고니아의 악명 높은 거센 돌풍이 호수에 불었고 카약은 전복되었다. 수온은 섭씨 4도 정도로 차가웠다. 리지웨이는 다른 카약에 의해 구조되었고 톰킨스는 급히 헬기로 운송되었지만 결국 병원에서 죽었다. 저체온증이 사인. 201512월 야생의 땅 파타고니아의 호수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72세에 삶을 마감한 톰킨스나 68세의 리지웨이는 과연 못 말리는 할아버지들이다.

 

그 사고는, 내 삶의 가치관도 바꾸었다.”

 

사진을 쓰다듬는 리지웨이 눈가에 습기가 번진다. 산이 맺어 준 오랜 친구들인 이들은 파타고니아에 무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톰킨스와 절친인 이들은 그때까지도 미지의 세계였던 파타고니아 피츠로이 등반에 나선다.

 

더글라스 톰킨스는 이본 쉬나드 등 친구들과 낡은 포드 밴을 타고 달렸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을 따라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등반에 나섰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았다. 그게 산악영화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는 영화 ‘Mountain of Storms’이다. 2010년 나는 크리스 멜로이 감독과 함께 그 여정을 새롭게 조명한 다큐 ‘180 Degrees South: Conqueror of The Useless’를 찍었다. 영화와 함께 책도 동시에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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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장간에서 출발한 파타고니아는 지금 글로벌 기업이 되었고 리지웨이는 산 증인.

 

1968년의 여정을 되짚어가는 내용의 이 영화는 미 전국 상영관에 걸려 호평을 받았다. 그만큼 이들 애정이 깊은 파타고니아는 이본 쉬나드에 의하여 아웃도어 브랜드 이름으로도 선택된다. 피츠로이의 정상 바위능선 그림이 파타고니아 로고가 된 것. 노스페이스 파타고니아 등 각자 아웃도어 사업에 크게 성공한 이들은 파타고니아 보호에 발 벗고 나섰다.

 

우리는 막연한 자연보호를 하는 게 아니다. 사라져 가는 다양한 토착종에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하고 착취 자연과 경제에서 절약과 생태 관광의 경제로 야생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톰킨스를 주축으로 우리는 딥에콜로지 재단(DEF)을 만들었다. 파타고니아 야생의 땅을 사들여 개발이 불가능한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공원을 기증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만든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지웨이의 말대로 이들 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사유지를 사들였다. 그 땅에 야생공원인 푸말린 자연공원을 만들었다. 지구 땅 끝, 인적 없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의 공원 크기는 서울 면적의 15배나 되는 220만 에이커, 대략 27억 평이나 되는 넓이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국립공원이 된 아르헨티나의 몬테레온(Monte Leon), 칠레 파타고니아의 코르코바도, 아르헨티나 최대의 야생 습지 에스테로스 델 이베라 공원도 만들었다.

 

이런 엄청난 실적이 있기에 리지웨이는 환경운동가로 미국에서도 명망이 높은 것이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파타고니아를 찾아 카약을 즐기고 공원을 만드는 노익장. 그러고 보니 반바지 차림의 리지웨이 다리 근육이 돋보인다. 그는 저 다리 힘만으로 2004년 손수 만든 리어카를 끌고 무인지구인 티베트 창탕고원 500km를 걸어 횡단했다. 멸종 위기 종인 티베트 영양 치루(chiru)를 위해서였다.

 

2009년 리지웨이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1년에 한 명 선정하는 어드벤처 베스트에 뽑혀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그는 세계적인 논픽션 작가이며 사진가이자 영화 기획자다. 또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ABC, NBC, ESPN 등 방송채널에 탐험 기록물을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도 맡은 적이 있다.

 

자연은 후손에게 빌려 쓰는 고마움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와 리지웨이는 수많은 등반과 원정을 함께 하며 우정을 쌓아 온 사이였다. 한국식으로 말한다면 오랜 산악계 선후배 관계.

 

여기서 일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오랜 악우 취나드의 입사 권유가 멋있었다. 자연을 보전하고 보호하는데 앞장서 달라는 말이었으니까.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환경관련 책을 펴내고 그런 단체를 찾아 후원하는 일. 우리 회사의 총매출 1퍼센트를 환경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큰 금액이다. 우리의 환경보호 아이디어는 미국 전국에 번져갔다. 지금은 매출 일정 부분을 기금으로 내어 놓는 기업이 이미 천 개가 넘었다.”

 

그러고 보니 리지웨이는 대화 중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환경을 앞세우고 있었다. 특정 종교가 없다는 리지웨이. 자연주의자답게 만물의 근본이 되는 자연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시에 자연교를 믿는 신도처럼도 보인다.

 

예전에 아프리카 2위봉인 케냐 산을 오른 적이 있다. 그때는 정상을 오르기 위해 아이스클라이밍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빙하가 이제 없어졌다. 기후 온난화 때문이다. 우리 후배들은 그런 사실을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을 착취하거나 괴롭히는 건 후손들에게 빌려 쓰고 있는 자연에 대하여 죄를 짓는 거라 생각한다.”

 

그가 쓴 책이나 자연 다큐물에서 강력한 리지웨이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멸종위기 티베트 영양을 보호하기 위한 창탕고원 횡단기 ‘THE BIG OPEN’도 그렇다. 그의 베스트셀러 <킬리만자로의 그림자> 역시, 환경 고발서였다. 킬리만자로 빙하가 녹아 가고 있고 공생해야 할 동물들이 멸종으로 몰리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탐욕에 대한 고발서가 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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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 쉬나드가 만든 이 대장간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미국인들은, 아니 세계인들은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구는 하나밖에 없다. 생물학적 나이 때문에 이젠 격렬한 등반을 떠나 자연을 좀 더 심도있게 공부하는 셈이다. 야생으로 옮긴 나의 관심은 모든 감각과 느낌이 동원된 새로운 자연에 대한 눈뜸이랄 수 있다. 누군가는 우리가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경고음을 울려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산악문화를 바라보는 기준점이 된다.”

 

파타고니아는 3억 달러에 달하는 연매출에서 세금 공제 전 1퍼센트에 달하는 기금을 환경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 사실 때문에 파타고니아는 착한기업으로, 환경보전 사업의 선도 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리지웨이는 산악인이라는 유목적 자유로운 삶을 그치고 부사장이 되었다. 회사를 통해 자연보호 꿈을 이루기 위해 결합한 것이다. 작가적 상상력이 풍부한 리지웨이가 파타고니아의 이상을 홍보하는데 가장 적임자였을 것이다.

 

우리 회사의 출판사업부 신설도 그 일환이다. 서적 발간은 돈을 위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환경과 야생, 모험에 관련된 책을 이미 여러 권 발행했다. 우리는 그 책을 통해 자연에 대한 우리 회사의 생각을 널리 알리겠다는 게 목적이다.”

 

미팅룸 옆에는 리지웨이가 제작한 산과 탐험에 관련된 책들이 여러 권 꼽혀 있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리지웨이의 말은 조곤조곤하지만 그대로 글로 바꿔도 될 만큼 논리 정연했다. 그리고 자연을 왜 신처럼 떠받들어 생각해야 하는지 경청할 가치가 있는 발언들이었다.

 

한국 산악인들에게도 자연에 대한 생각을 한마디 하라고? 간단하다. 세상의 모든 산악인들이 그렇겠지만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자연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산악인들이 환경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하나뿐이다. 진정한 산악인이라면 그걸 우선 알아야 한다.”

 

학자의 길과 야생의 길

 

당신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선정위원회에서 투표로 제1회 산악문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깜짝 놀랐다. 크리스 보닝턴처럼 유명한 산악인 중에서 내가 선정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솔직히 고마웠다. 내가 평생 추구해왔고 진행하고 있는 자연과 산악문화에 대한 종합적 노력을 평가받은 것 같아서였다.”

 

자연에 대한 종합적 노력은 무얼 말하는가.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의 생각, 즉 산악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제대로 수상자를 고른 셈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산악운동과 탐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작가이니까. 원래 리지웨이는 학자가 될 뻔 했던 인물이다. 1975년 리지웨이는 미국의 명문대 버클리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지구물리학 5년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나 그때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는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려 두 번째 꾸려진 에베레스트 원정대였다. 리지웨이는 당장 학교를 때려 치웠다.

 

지금은 번잡한 도시가 되었으나 오렌지 밭이 즐비한 LA근교 오렌지 카운티가 내 고향이다. 1963년이니 내가 15살이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오렌지 밭이 건물로 점령당하는 게 보기 흉하여 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산에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클라이밍과 산을 배웠다. 그렇게 산에 빠져들어 가던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에서 미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자 짐 휘태커의 표지 사진을 봤다.”

 

어린 산악인 리지웨이에게 짐 휘태커는 우상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처럼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1976년 그는 에베레스트 원정길에 올랐다. 청년 리지웨이는 원정대원으로 선발될 만큼 등반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때 정상은 오르지 못했다. 다만 에베레스트 등반 다큐 팀을 도우며 영화제작을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이 큰 경험이 되었다. 귀국 후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한 책을 쓰고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다큐멘터리 필름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팔며 자신만의 미디어 경력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년 후인 1978년 나의 우상인 짐 휘태커가 대장이 되어 K2 대원으로 나를 불러줬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는가? 동경했던 영웅과 한 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등반에서 리지웨이는 존 로스켈리와 무산소로 K2 정상을 오른다. K2를 오른 최초의 미국인이 되는 쾌거였다. 15세 꿈 많은 소년의 우상이었던 짐 휘태커처럼, 리지웨이도 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표지에 당당한 얼굴을 올린다. 가정은 부질없지만 리지웨이가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탐험가이자 산악문화의 전도사를 만날 확률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안락한 장래가 보장된 학자의 길을 떠나 스스로 야생의 길을 선택했다.

 

180° 사우스를 출품하고 싶다

 

영상보다 더 파괴력이 큰 게 있을까. 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단 기간 세계의 호응을 받은 이유도 그런 부분에 힘입었다. 리지웨이가 데비 무어 등 헐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가 있다. 미 전역에서 개봉된 <180° 사우스>라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에서 공동제작을 맡은 리지웨이는 같은 제목의 책도 발간했다. 할리우드 스타일이 그러하듯 이 영화도 몇 년간 큰돈을 들여 제작되었다. 파타고니아 마니아답게 그곳 날것의 자연과 산 탐험에 나서는 인간들을 출연시켜 야생의 영상과 자연보호의 당위성을 홍보한다는 콘셉트였다.

 

울주영화제에 출품을 한다면 여태 만들어 온 많은 영상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내가 물었다. 리지웨이는 방송과 영화를 넘나들며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80° 사우스>. 그만큼 완성도가 높다. 2년 전 나와 함께 카약을 타다 숨진 더글라스 톰킨스가 출연했기에 인연도 깊다. 1968년 톰킨스와 이본 쉬나드 등이 함께 낡은 포드 밴을 타고 찾았던 파타고니아. 그때 피츠로이 초등 등반과정을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았던 ‘Mountain of Storms’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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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와 함께 한 평범한 할아버지의 미소가 환하다

 

“7년 만에 만나는데 처음 만난 이후 다시 만든 영상이나 책이 있나?”

 

없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파타고니아에 공원을 만드는 등 몹시 바빴다. 나와 우리는 야생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로서 글에 대한 갈증에 목이 마르다. 여러 구상은 하고 있으나 정말 바빠서 글 쓸 시간이 없다.”

 

당신은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글을 잘 쓴다. 글공부를 한 적이 있는가?”

 

없다. 대학에서 또 다른 나의 열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야생에서 한 행위를 글로 옮기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등반이나 탐험에 필요한 돈을 위해 페인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돈키호테 같았던 그때가 재미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리지웨이는 직업도 없이 1970년대 초 LA 인근의 타키즈 바위라든가 요세미테를 찾아 시간을 보냈다. 당시 리지웨이는 저 산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때가 산악선배인 이본 쉬나드를 만났을 때였다. 2000년 자신이 만든 어드벤처 사진과 필름 사업체를 팔아 치운 리지웨이는 이본 쉬나드의 파타고니아 입사제의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2003년 이사회에 합류했다가 2005년 환경 담당 부사장으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세븐 서미트란 용어를 만들어 낸 사람

 

저쪽에 허름한 양철집 공장이 보이는가? 내가 벤추라로 이사왔을 때 취나드에게는 저 공장이 전부였다. 지금은 박물관이지만 저곳이 글로벌기업 파타고니아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 회사는 미국 젊은이들이 입사를 원하는 착한기업도 되었고.”

 

리지웨이의 저작 중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불가능한 꿈은 없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에서 한국 산악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세븐 서미트라는 단어를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 내었다. 석유회사 사장이던 딕 베스와 굴지의 워너 브라더스 영화사 프랭크 웰스 사장이 리지웨이를 찾았다. 초보자지만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등정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 달라는 것.

 

오십을 넘긴 아마추어 산악인에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산악인의 정신 아닌가? 그래서 승낙을 했다.”

 

리지웨이는 실제로 이들과 함께 7대륙 등반에 성공한다. 돈 많은 책상물림 사장들이 각 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오른다는 발상이 통쾌하다. 본래 산악문화에서 매력적인 것은 산이 아니라 산에 오르는 인간들 이야기다. 그 등반을 마친 후 리지웨이가 펴낸 <불가능한 꿈은 없다>가 바로 그것이다. 긴 시간에도 리지웨이의 억양은 부드럽고 조용하다. 파란 눈의 노 탐험가의 순진한 표정과 목의 굵은 주름이 어울린다. 반바지에 맨발, 거기에 슬리퍼를 신은 모습이 보기 좋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 온 세월을 웅변하는 듯 당당하다.

 

한국 산악인 선우중옥씨는 우리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어 잘 안다. 우리는 함께 티톤으로 등반여행도 떠나곤 했다. 은퇴? 나에겐 그런 게 없다. 작가에게 은퇴란 없다. 회사에서도 은퇴할 생각이 없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요즈음 행복한 나날이라고 했다. 톰킨스의 잊을 수 없는 사고 이후, 회사 유아원에서 손녀를 안거나, 딸을 만나면 삶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절하게 든다. 리지웨이에게는 21남의 자식이 있다. 딸들은 클라이머, 아들은 서퍼다. 이본 쉬나드 딸과 선우중옥의 딸, 그리고 리지웨이의 딸과,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한 아시아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리지웨이 딸이 그랬듯 손녀가 대를 이어 회사 유아원에서 크고 있다. 아버지들처럼 아이들 역시 우정의 대를 이어가고 있는 중.

 

긴 시간 고맙다. 난 당신이 좀 더 글을 많이 쓰기를 바란다. 당신 글 팬이니까.”

 

약속한 시간을 넘기며 진행했던 일정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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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인터뷰를 마치고 가까워진 그를 울주영화제에서 다시 만났다.

 

울주가 한국 최초, 최대의 산악영화제라는 걸 알고 있다. 수고했다. 9, 울주세계영화제에서 만나자. 전 세계 대륙에 솟은 산이 셀 수 없이 많듯 산악문화야 말로 점차 그 다양성으로 인하여 더 주목받게 될 것이다. 나도 울주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미국 산악영화와의 연계도 고민해 보겠다. 산악문화란 서로 소통할 때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회사 문밖까지 배웅한 리지웨이와 악수를 나누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태평양 바다엔 하얀 돛을 단 요트가 떠 있고 물개 모양을 한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평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 온 할아버지 리지웨이. 나이는 생물학적 분류일 뿐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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